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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um 01. 되기 상태의 오류

간극: 정의연 사태를 이용수의 말하기로 맞이하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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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귀향(감독 조정래, 2016)’에서 ‘은경’의 몸에 빙의한, ‘위안소’에서 함께 돌아오지 못한 ‘정민’의 혼과 ‘영희’가 다시 만나 인사하는 귀향굿 장면. 포스트-피해자 시대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들이 아직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고 있는 이 시점에도, 그녀들이 부재하게 될 시점에도 우리는 ‘은경’. 그것도 빙의조차 할 줄 모르는 ‘은경’일 뿐이다. 우리는 그녀들과 어떻게 마주하고 어떤 위로를 보내는 ‘은경’이 될 것인가? 

간극:

정의연 사태를 이용수의 말하기로 맞이하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글: 조가빈 

“속이고 이용하고... 재주는 곰이 하고[넘고] 돈은 몇 사람이 받아먹었습니다. 저는 30년 동안 재주 했습니다[넘었습니다]. 그 돈은 몇 사람이 받아먹었습니다. 이런 것도 모르고 무엇을 용서를, 용서를 바랍니까? 그래서 저는 데모 방식을 바꾼다는 거지 끝내는 건 아닙니다(이용수 2차 기자회견 중).”

 

이 글은 생존자이자, 일본군 ‘위안부’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해 온 활동가이자, 일본군 ‘위안부’제도의 피해-당사자로서 말하고자 했던 이용수*의 기자회견, 그 중에서도 저 “재주넘는 곰”이라는 비유가 주는 충격으로 시작되는 글이다.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그녀는 국내의 여러 모금운동들에서도, 미국의 의회라는 국제무대에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첫 기자회견 후에 생각하지 못하게 밝혀진 부분들은 검찰에서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돈 받아먹은 몇 사람”인 정대협/정의연** 내지는 윤미향이 받아먹었다는 돈이 그녀를 화나게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스스로를 재주넘는 곰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 상황, 말하자면 증언했지만 증언하지 못했다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이 충격은 쉽게 가시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고이 보내드려서도 안 될 것 같다. 그래서 이 글은 우리가 그녀의 이번 기자회견을 다시금 곰이 넘는 재주로 만들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녀의 말을 당사자의 실천으로서 맞이하기 위해, 적어도 최선은 다해보려는 시도이다. 나의 생각에 이 시도는 당사자인 그녀와, 당사자가 아닌, 당사자일 수 없는 재현자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이 기자회견에서 드러난 것들 중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30년 간 정대협과 함께 ‘위안부’ 운동에 참여해 온 이용수가 ‘위안부’ 운동과 정대협 운동을 구분짓고 있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간의 ‘위안부’ 운동에서 ‘위안부’ 피해의 당사자와 정대협이라는 재현자 사이에는 확실히 간극이 있었다는 뜻이다. 

 

비슷한 다른 사례를 경유해서 이 간극을 좀 더 명확히 해보자. 이용수 기자회견 이후에 과거에도 정대협에 대한 비판이 있었던 사례로서 ‘세계평화 무궁화회 33인’의 입장문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심미자를 필두로 한 33명의 그녀들은 아시아 여성기금 수령에 관하여 정대협과 입장이 달랐고, 2004년 1월, 정대협을 비판하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최근 다시 회자되고 있는 덕에 입장문 전문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내용과 논조는 정대협의 운동에서 그녀들이 소외되고 있다는 비판이라는 점에서 이용수의 기자회견과 유사하다. 즉, 재현자로서 정대협과 두 당사자 사이에 간극이 있음은 확실해 보인다. 그런데 나는 이 입장문에서 보아야 할 간극의 포인트를 무궁화회의 ‘위안부’로서 당사자되기가 이용수의 당사자되기와는 다른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찾을 것을 제안하고 싶다. 두 당사자 모두 ‘역사의 산 증인’으로 스스로를 소개하지만, 이용수의 경우 여성인권운동가로서 활동을 공개적으로 지속하는 방식을 택했고 무궁화회의 경우 자신의 문에 대해 보상을 받고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것 같)다.

문제는 그런 차이를 강조하는 또 다른 재현자, 지만원이 등장하면서 난해해진다. 무궁화회의 말하기가 현 시점에서는 “정대협에 대한 당사자의 비판”이 과거에도 있었던 사례로서 다시 등장했지만, 그녀들이 말하던 시점에는 정대협과는 다른 말하기 방식을 원했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그녀들이 정대협을 비판했다는 사실이 제대로 조명 받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녀들의 말하기는 지만원을 통해 “진짜 위안부”의 기준으로서 소환되었다. 무궁화회의 입장문을 접하고 그녀들을 인터뷰한 지만원은 2005년 자신의 홈페이지에 그녀들이야말로 진짜 위안부이고, 그 외에는 가짜 위안부들이 많이 있으며, 정대협은 가짜 위안부들과 함께 종북/반일 운동을 진행한다는 글을 게재해서 논란이 되었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 비판이 쏟아진 것은 물론이고, 정대협 등 당시 ‘위안부’ 관련 단체들은 명예훼손 소송을 걸기도 했다. 나는 여기서 재현자로서 지만원이 그녀들의 말하기를 진짜/가짜 ‘위안부’의 기준으로 만들고, 그로써 정대협을 종북/반일 단체라며 비판한 방식을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 또한 최근의 문제제기까지 이어지는 정대협의 운동방식에 대한 비판들을 정치적 흑막이 있다는 식으로 기각할 생각 역시 없다. 오히려 이 비판들은 너무나 중요하고, 그녀들의 말하기를 다시 들어봐야 할 계기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무궁화회의 말하기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의 중심, 즉 ‘위안부’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고 구분하고, 정대협이라는 운동단체의 성격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이 논쟁 속에서 무궁화회의 말하기는 또다시 소외되고 있다는 께름칙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무궁화회의 말하기를 둘러싼 두 재현자, 지만원과 정대협이 서로 자신을 진정한 재현자라며 서로의 당사자 재현상을 비난하는 와중에 당사자는 어디로 갔는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무궁화회가 말하던 당시에 그녀들의 말하기를 제대로 봐주지 않았던 지만원, 정대협, 우리 모두의 태도는, 정대협이 이용수들을 곰으로 부리고 혼자 돈 받는 사람이었다는 비판과는 또 다른 맥락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런 점에서 이용수의 기자회견을 계기로, 정대협에 대한 비판이 과거에도 있었다는 증거로서 무궁화회가 다시 회자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씁쓸하다. 무궁화회를 이렇게 다시 소환하는 것은 이용수의 기자회견 또한 “정대협 비판”으로 축소시켜버리고 마는 증상의 하나인 것 같다.

과거에 발언했던 심미자와 무궁화회도, 이번에 발언한 이용수도, 눈 감는 순간까지도 여성 인권운동가였던 김복동도, 이번 사태의 소란 속에서도 조용히 삶을 이어가는 길원옥도, 그 외 여기에 적지 못하는 다른 이름들 모두 그 전에도, 그 당시에도,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당사자다. 그녀들이 서로 다른 경험들을 갖고 있고 문제 해결에 관하여 다른 입장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녀들이 당사자임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녀들이 서로 다른 방식의 말하기를 수행한다고 한들 가짜 당사자란 개념상 불가능하고, 그들은 말하고 우리는 듣고, 잘 해야 재현할 따름이다. 그녀들과, 정대협이든 지만원이든 우리 중 그 누구든지 간에 그 사이에는 확실히 간극이 있을 뿐인 것이다.

 

간극.

확실히 그동안 ‘위안부’ 운동의 대표적 재현자였던 정대협의 방식은 그녀들의 말들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해왔던 것 같다. 이용수의 말하기를 통해서 비로소 이 간극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지만, 우리는 이 간극을 비로소 마주한 바로 이 시점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게다가 도래하는 죽음을 막을 수 없기에 ‘포스트-피해자[당사자] 시대’의 ‘위안부’ 문제를 고민하는 주제들이 여기저기 등장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 시대가 아직 오지 않은 시점에서 재현자, 그것도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던 재현자마저 당사자와 간극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사실, 심지어는 그들 조차 그 간극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어쩌면 천만 다행이다. 여러 당사자들이 말하기를 시작한지 근 30년이나 되어서야 그들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으니, 우리는 이 간극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모금이나 여타 운동 관련 행사들에 그녀‘들’의 의사를 좀 더 잘 반영함으로써? 그 어떤 정치적 흑막이 예상될 만한 언행을 조심하면서, ‘진실되게’ 진실을 말함으로써? 다 좋은데, 내 생각에는 이 간극은 당사자가 아닌, 당사자가 아닐 수밖에 없는, 우리가 좁히려고, 좁혀야 한다고 생각할 때, 사고뭉치 말썽꾸러기가 되는 것 같다. 그러니 지금은 이 간극을 좁히거나 없애려는 것보다는 음미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치 코로나 시대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고립과 소외보다는 차라리 인정과 배려의 수단이듯이.

* ‘위안부’ 피해자들을 부르는 호칭은 피해자/전‘위안부’/전시 성노예/생존자 등으로 다양하다. 이 호칭들은 각각의 뉘앙스를 가져서 화자/필자가 피해자를 어떤 맥락에서 호명하는지에 따라 선택적으로 사용되는 듯하다. 이 글에서는 이들을 이름으로만 부름으로써, 호칭에 의해서는 어떠한 뉘앙스도 주지 않으려는 시도를 해본다. 이 시도 역시 곧 언급할, 그들을 재주넘는 곰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최소한 노력은 해보려는 시도의 하나이다.

**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정의기억연대는 완전히 같은 단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대협에서 정의연으로 이어지는 연속성 내지는 관계성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 글에서는 두 단체를 구분하기 보다는 ‘위안부’ 운동에서 그녀들의 대표적 재현자로서 동일한 지위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이 단체들을 소환하는 문장이 어느 시기에 관련된 것인지에 따라서만 정대협/정의연을 구분하는 식으로 두 단체명을 혼용하고자 한다.

말하기를 맞이한다는 건 지속될 미래에 대한 환대

재현이 지닌 규범적 성격은 조가빈 필자의 지적처럼 문제를 간결하게 만든다. 각종 각양의 목소리를 무두질한 언어(그녀‘들’)로 표기함으로써 목소리의 동질성이 강조된다. 그녀‘들’은 재현 기호인 ‘위안부’에서 벗어나지 않게 ‘언행’을 조심해야 하고 ‘진실’에의 순결을 누구보다 강요받게 된다. 도덕적 자기 고백의 서사를 촉구 받는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규범적 이행은 존재론적으로 부차적이어야 할 재현자가 오히려 당사자성을 승인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녀‘들’을 생산하는 이 재현구조는 더욱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주체-객체라는 이분할 속에서 그녀들은 대상화된 것일까? 재현의 정치학이 지닌 난점이 여기서 발견된다. 재현이란 거울 작용이 아니다. 그녀들은 단순하게 대타자에 의해 비치지 않는다. 대상화에선 절대적인 수동성이 문제 되는 것이라면 여기서 지적하고 하는 바는 가장(假裝)된 능/수동성이다. 예컨대 김민주 필자의 「n번째 노예」에서 여성은 남성의 가장된 능동성을 생산하는 장치로 본다. 즉 주체의 능동성과 객체의 수동성은 그 전에 비체(非體)의 선별을 토대로 한다. 정대협과 지만원 그리고 그 밖의 재현자가 벌이는 ‘진짜/가짜’에 대한 논쟁은 이미 선별된 읽기의 결과이다. 우리는 아니라고 말할 때조차 이미 재현의 덫에 걸린 셈이다. 

 

우리는 재현이란 메가폰을 통과하지 못한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었을까? 그러나 누구의 목소리를 들을 것인가? 위안부, 전시 성노예, 피해자, 그것도 아니면 생존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일까? 조가빈 필자는 이렇게 모델화된 서사 읽기에 앞서 타자-정체화된 언술을 걷어낸다.**사태를 단순화하려는 경향, 즉 사건을 단번에 해결하고 간극을 봉합하려는 누빔질을 경계한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은 재현자가 판관이 되어 명석판명한 판결을 내릴 준비가 됐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희망 없이 ‘목소리’를 짊어질 준비가 되었느냐고 묻는 것이다. 말하기를 맞이한다는 건 지속될 미래에 대한 환대이다. 

포스트-당사자 시대가 우리에게 두 가지의 윤리적 태도를 요구한다. 지금-여기서 해결해야 할 문제의 ‘긴급함’과 봉합되질 않고 ‘지연’될 역사-정치적 책무를 함께 지는 것이다. 재현의 정치와 당사자의 목소리 사이, 이 간극이 역사라는 무한의 시간을 연다. 이 시간은 청산하고 갚아야 할 부채의 시간이 아닌 지속될 미래의 시간이다.

 

“심지어는 그들조차 그 간극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어쩌면 천만다행이다. 여러 당사자들이 말하기를 시작한 지 근 30년이나 되어서야 그들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으니” (조가빈) 

 

2020년 5월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17명이다. 보고 듣고 있는 것만이 명백한 것은 아니다. 

* 그녀들은 ‘조선의 딸’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이며 일본의 ‘성 착취’는 ‘한국 근대사’의 아픔이자 해결해야 할 ‘숙제’이다. 위안부를 이해하는 위와 같은 기호의 연쇄는 사태를 한 방향으로 읽기를 강요하고 있다. 남근중심주의-전통(조선)-식민주의 여성상이 자연스럽게 투사된 것으로, 조선의 딸이란 언명에는 순결과 (아버지)수치심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이러한 가부장적 세계관은 ‘위안부’에서 따옴표를 벗겨내어 ‘한국 근대사’라는 거대한 역사 담론 아래에 스스로를 중립적인 기표로 변환한다.

** "이 글에서는 이들을 이름으로만 부름으로써, 호칭에 의해서는 어떠한 뉘앙스도 주지 않으려는 시도를 해본다. 이 시도 역시 곧 언급할, 그들을 재주넘는 곰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최소한 노력은 해보려는 시도의 하나이다.” _조가빈

*** “이 간극을 당사자가 아닌, 당사자가 아닐 수밖에 없는, 우리가 좁히려고, 좁혀야 한다고 생각할 때, 이 간극이 사고뭉치 말썽꾸러기가 되는 것 같다.”_조가빈

​_히스테리안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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