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장을 가득 채운 수다스러운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집니다. 제목의 선언에서 느껴지는 위풍당당함. 표지를 가득 메운 책의 인사말, 손에 감싸지는 책의 촉감, 종이를 넘길 때의 바스락 소리는 과거로, 미래로, 무한의 공간으로 나를 이끕니다. 그러나 어쩐지 저자의 전지전능함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 채 발길을 돌립니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 모든 지식이 나를 향해 있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속에서 지식에 다가가지만, 무엇을 선택하고 선택하지 말아야 할지 망설임을 따릅니다. 도서관은 정보가 진열된 장소가 아니라, 선택할 수 없는 문제들이 가득한 장소이기 때 문입니다. 알고자 하는 욕망 앞에 눈이 멀어 길을 잃습니다. 희고 검은 종이 위에 새겨진 잉크의 농도가 전부였던 찬란한 시절이 무한히 복제되며, 가지각색으로 변주됩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가 다층적이고 복잡해질수록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워집니다. 진실을 향한 몸짓은 방위를 잃었고, 그러므로 진실이 있다고, 혹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여전히 ‘문제’를 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끝없이 읽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가 누구인지 자각하게 만듭니다.
수다스러운 적막—책들이 침묵하면서도 끊임없이 속삭이는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공간에서, 도서관의 서로 다른 텍스트들은 서로를 인용하면서도 배반합니다. 문장을 움직이는 시선과 욕망하는 손끝이 책을 고르며, 주소지가 있는 책의 자리는 고정된 듯 보이지만, 언제나 미묘하게 어긋나며, 질감으로 이웃합니다.
어떤 책은 대담한 이미지의 조합으로, 혹은 한 문장 한 문장의 행간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는 물성으로, 그 존재를 드러냅니다. 저자와 독자 사이를 매개하는 디자인은 관념을 물성 안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텍스트를 분해하고 조립하고 배치하고 면면을 구축합니다.
디자인 스튜디오 파이카(이수향 · 하지훈)는 지난 10년 동안 각양각색의 디자인을 진행해왔습니다. 전시, 워크숍, 세미나, 축제, 공연 등 문화예술계 현장에서 다양한 메시지를 종이 위로 그려냈습니다. 파이카는 감각이 기록되는 방식을 탐구하며, 그것이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읽히는지를 고민해왔습니다. 그러나 문화예술 분야에서 제작된 아트북들은 종종 제한된 독자에게만 그 가치가 전해졌고, 그 미적 깊이와 실험정신은 충분히 공유되지 못한 채 흩어지곤 했습니다. 이번 전시는 파이카가 디자인한 책들을 공공 공간인 구산동도서관마을에 펼쳐놓음으로써, 예술 출판물이 지닌 감수성과 현대미술의 흐름을 살핍니다.
디자인은 정보를 전달하는 일종의 프로파간다를 지니며, 동시대 미적 실천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작가와 작품의 의도를 넘어, 디자인을 통해 가장 먼저 도달하는 메 시지는 미적 실천과 문제의식을 드러냅니다.
저자와 독자를 매개해 온 파이카는 이번 전시에서 200여 종의 인쇄물—아트북, 전시 도록, 브로슈어, 리서치 문서들을 선보입니다. 제도적 유통으로 포획되지 않은 인쇄물이 공공도서관의 서가에 놓을 때, (No)ISBN, 공적인 번호가 없는 책들이, 묶이지 못한 활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울려질 수 있는지를 탐색합니다. 전시는 도서관 환상이라는 매혹을 구체적으로 그려보고자 합니다. 비정형 인쇄물들이 서가에 자리 잡고, 이웃하는 판형과 주제가 서로를 불러내며, 정보 중심의 분류 대신 감응의 중심의 분류가 작동하는 도서관. 저자의 위엄보다 접속을 중시하는 아카이브에 대해 말입니다.
활자의 굵기가 속삭이는 목소리, 여백이 만들어내는 침묵의 농도, 문장들의 배치가 새로 쓰는 감각의 지도. 그렇습니다. 이곳에선 길을 잃어도 좋습니다. 생경한 텍스트의 미로에 빠져, 의미보다 먼저 다가오는 텍스트의 몸짓과 본능적인 글자의 문체 속으로 들어갑니다. 글: 강정아
전시기간: 2025. 9. 2 (화) ~ 9. 30 (화)
장소: 구산동도서관마을(서울특별시 은평구 연서로 13길 29-23) ※ 매주 월요일 휴관
기획 및 디자인: 파이카(이수향·하지훈)
서문 및 프로젝트 매니저: 강정아
큐레이션: 구산동도서관마을 사서(양승헌, 최지희), 출판사 히스테리안
협력 및 후원: 구산동도서관마을, 출판사 히스테리안
주최 및 주관: 파이카
디자인 스튜디오 파이카(PAIKA, 이수향·하지훈)의 10주년을 기념하는 릴레이 전시가 갤러리 구루지, 미학관, 신촌문화발전소를 거쳐 구산동도서관마을에서 이어집니다. 갤러리 구루지에서는 2017년과 2023년 작업을 통해 지난 10년간의 예술과 디자인의 흐름을 조망하며, 미학관에서는 스튜디오의 아이덴티티를 담은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선보입니다. 신촌문화발전소에서는 2016년과 2024년 포스터 작업을 전시 공간에 맞춰 재구성해 소개합니다.
사진(오) 파이카 10주년 기념 전시(2025.6.7-6.20), 갤러리 구루지 1전시실, 전경사진, ⓒ파이카
사진(왼) 파이카 10주년 기념 전시(2025.7.8-8.13), 신촌문화발전소, 전경사진, ⓒ파이카

구산동도서관마을에서 선보이는 파이카의 전시는 200여 종의 인쇄물을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아트북, 전시도록, 리플렛, 브로슈어, 소책자 등 파이카가 지난 10년간 제작해온 다양한 인쇄물은, 주로 문화예술계의 문제의식을 담은 전시와 연계되어 왔으며, 이를 통해 동시대 미술의 흐름과 담론을 짚어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다양한 판형과 실험적 디자인을 제작한 파이카의 제작물들이 이번 전시를 통해 지역사회와 공유되며 더욱 넓은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전시가 열리는 구산동도서관마을은 2015년 11월, 동네 주민들의 노력으로 문을 연 지역 커뮤니티 도서관입니다. 단순히 책을 읽는 공간을 넘어, 이웃과의 교류와 문화적 경 험이 가능한 생활 속 배움터이자 쉼터로 자리매김해 왔습니다.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누구나 편하게 찾아와 책을 읽고,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열린 공간입니다.
개관 10주년을 맞은 구산동도서관마을은 앞으로도 책과 사람, 문화가 어우러지는 커뮤니티로서의 가치를 지향하며, 이웃과 연결되는 행복한 플랫폼으로 성장해 나가고자 합니다. 이번 파이카 전시는 그 여정에 함께하는 뜻깊은 자리입니다.
파이카 10주년 기념 전시, 「종이 위의 풍경들」(2025.9.2-9.30), ⓒ구산동도서관마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