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um 01. 되기 상태의 오류 : n번째 노예
n번째 노예
글: 민 주
2020년 3월 7일
보고 싶은 q에게
선생님! 안녕하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놓여요. 전 세계적인 전염병 사태를 지혜롭게 보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저도 무사합니다. 일상이 조금 바뀌기는 했어요. 지난 몇 주간은 요가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운동 시설은 운영을 자제하라고 국가가 권고했기 때문이에요. 대신 유튜브에서 실시간 요가 영상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아침마다 이름 모를 수백 명의 요기니와 함께 수련하는 거예요. 느슨하고 거대한 연결이지요.
미술관과 도서관도 문을 닫았습니다. 그간 온통 작품에 둘러싸인 채 살고 있었단 걸 다 없어지고 나서야 알았어요. 태어나지 못한 전시와 공연은 어디로 갈까요? 작가들은 어떻게 작업하고 돈을 벌까요? 그들의 전시를 보며 공부하던 학생들은 순식간에 전소한 미래 생태계를 보며 절망하지 않았을까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요? 선생님, 우리를 정말로 힘들게 하는 건 끝에서부터 겪는 붕괴와 공포일 거예요. 전염병의 여파로 생계노동을 삼 주간 쉬면서 저의 이 공부하는 삶이 못 미더워 몸을 떨었습니다. 수요되는 것에만 살 자격을 주는 자본주의라는 존재론이 왜 당연한 걸까요?
매일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원하고 있어요. 선생님이 안전하기를, 제가 안전하기를,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모든 사람이 보호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2020년 4월 20일
정말 필요한 걸 만드는 것도 아닌데 왜 예술가들에게 돈을 지불해야 할까요? 왜 그들의 생계를 보장하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할까요? 여기에 답하기 위해 예술가들은 예술이 이 사회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역설합니다. 예술은 우리 삶과 사회를 지탱하는 필수 요소니까요. 이 설명에는 틀림이 없습니다만, 이 대답과 저 질문엔 같은 전제가 담겨 있습니다. 사랑받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음이 마땅하다는 전제 말이에요.
예술은 수요의 지령에 따라 이루어지는 생산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바로 그것’을 만들어내는 게 이 시대의 생산이라면, ‘그것’이 없던 시점에 시작되는 걸 예술이라고 부르고 싶거든요. 예술이 수요 이전에 있음을 잊은 채 우리는 죽은 예술가 뒤에 남은 생산만을 어른 자격의 척도로 삼고 있어요. 수요가 있는 것만이 돈이 되고, 돈이 있어야만 살아있을 수 있기에, 이 시스템은 존재론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우리의 감각은 그 시스템의 토양이지요.
선생님, 코로나19는 무엇이 질서라는 얇은 선 위에 살아남고 무엇이 소리 없이 떨구어졌는지를 한결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이 시대가 사랑하지 않아 괄시된 가치들은 어떤 모습으로 생존했을까요? 온 시대가 사랑하느라 용인되어온 것들은 어떤 이름으로 존속하고 있을까요?
2020년 7월 6일
전시장과 운동 시설이 문을 닫은 사이 룸살롱과 클럽은 성행했다고 해요. 사람이 모이는 게 위험해 운동도 예술도 참아야 한다면, 클럽은 정말로 정말로 참아야 하는 곳일 텐데 이상한 일이에요.
선생님! 실은 요즘 들어 이상하다는 게 어떤 감각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곳이 이상한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달랐던 거에요. 저와 친구들과 선생님이 나누던 상식이 현실과 달랐던 것입니다. 이곳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일관적이었던 것 같아요.
몇 달 전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사건이 있었어요. 여성을 성착취한 영상을 메신저를 통해 사고판 일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거든요. 처음에는 문형욱이라는 남자가 8개의 채팅방을 만들었다고 해요. 조주빈이라는 남자가 운영하던 방이 잘 알려져 있어요. 피해 여성들은 노예라고 불리었고, 회원들이 내린 지령을 수행하는 영상을 찍어야 했다고 해요. 충격적인 건 방에 참여한 사람 수가 26만 명으로 추산된다는 점입니다. 작년 2019년을 기준으로 15살에서 64살 남성 73명 중 한 명꼴이에요. 73명 중 1명.
또 다른 일이 있었어요. 손정우가 출소한 일이요. 손정우라는 남자는 비성년 아동 성착취 영상을 전 세계적으로 유통한 일로 1년 6개월을 복역하고 나온 참입니다. 손정우의 영상을 받기 위해 회원들은 새로운 성착취 영상을 찍어 올려야 했다고 해요. 미국이 손정우를 처벌하기 위해 범죄인 인도 요청을 했지만 대한민국 법원은 송환 불허 결정을 내렸고, 손정우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영상을 만들고, 그걸 사기 위해 지불하고, 지불하기 위해 다시 영상을 만드는 남자들. 그 공동체 안에서 여성은 몸이고, 그 몸은 인간이라는 격이 절단되고 남은 신체처럼 보여요. q가 아닌 몸, 민주가 아닌 몸이요. 낯설지 않아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온라인 기사에 들어찬 광고 속 몸이나 지하철 전광판 속 성형되어야 할 부위들 모두 누구의 몸도 아닌 채 프레임 안으로 잘려나간 모습이잖아요. 어쩌면 여자란 단어의 의미 한편에는 오랜 시간 ‘절단된 신체’가 있어온 건 아닐까요? 여성이 절단된 신체라는 걸 우리만 몰랐던 건 아닐까요?
자연과 욕망의 주인들은 그네가 해온 착취소비를 자본의 시대에 맞게 시스템화한 것입니다. 예술이 멈춘 사이에도 성착취를 향한 의지는 수요-공급이라는 지상법을 어깨에 두르고 살아남잖아요. 이건 특정 취향의 성욕에 관한 문제가 아니에요. 제어할 수 없는 본능의 문제는 더더욱 아닙니다. 단순하게 가부장적 사고관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도 한참 무디어요. 이건 차라리 위계화하는 권력의 문제입니다.
2020년 7월 30일
선생님, ‘절단된 신체’는 기능에 따라 파편화된 여성의 몸을 생각하며 한 말이었어요. 성 기관의 수요, 만져질 것의 수요, 애교라는 태도의 수요, 웃는 입과 희생적인 정신의 수요 같은 것이요. 사실 그건 삽입과 지배의 수요, 침탈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해야 할 필요일지도 몰라요.
남자에게 여성은 자기를 실제보다 더 크게 비추는 거울이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이 지난 편지를 보낸 이후로 한참 맴돌았어요. 1929년에 그녀는 『자기만의 방』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성은 지금까지 수 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실제 크기의 두 배로 확대 반사하는 유쾌한 마력을 지닌 거울 노릇을 해왔습니다. [...] 거울의 용도가 무엇이건 간에, 거울은 모든 격렬하고 영웅적인 행위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폴레옹과 무솔리니는 여성의 열등함을 아주 힘주어 강조합니다. 만일 여성이 열등하지 않다면 거울은 남성을 확대시키기를 그만둘 테니까요. 그것은 여성이 남성에게 무척 빈번히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일면 도움이 됩니다. [...] 만일 여성이 진실을 말하기 시작한다면, 거울 속의 형체는 오그라들 것이고 삶에 대한 적응력도 감소될 것입니다. 아침 식사와 저녁 식사에서 최소한 실제 크기의 두 배인 자기 모습을 볼 수 없다면 그가 어떻게 계속해서 판결을 내리고 원주민을 교화하며 법률을 제정하고 책을 집필하며 정장을 차려입고 연회에서 장광설을 늘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우월한 것으로 설정하지 않으면 지금의 자그마한 자신을 지탱할 수 없는, 기생적인 자기 정체화 같은 것이 있는 게 아닐까요? 어떤 사람이 명문대 출신이 아닌 자를, 빈자를, 여자를 하대해 자신의 위대함을 끊임없이 확인할 때처럼 말이에요. 자긴 그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믿음으로써 그 혐오를 정당화할 때가 바로 ‘무시해도 될만한 자’가 탄생하는 순간일 거예요. 선생님, 우리는 이 용도에 맞게 고안된 사람들에 관해 오래 이야기 나누어왔지요. 층층이 마련된 차별, 직업과 연봉에 따른 계급화, 피부색과 생김새에 따른 구분, 출신 국가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양반에게 상놈이, 귀족에게 하인이 그랬던 것처럼, 시대와 문화에 따라 모양을 달리하던 유구한 이 관계에 관해서요.
노예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귀찮은 일을 대신 해줄 수족이 필요해서만이 아니고요. 조아리는 자가 있을 때 마주한 자가 두 배로 커 보이기 때문에요. 아마도 그 밑에는 자신의 존재 의미가 부재한다는 데에서 오는 절망이 있는 것 같아요. 거울을 보면 초라한 나뿐일 때, 그 상을 지울 쉬운 방법 중 하나가 노예를 만드는 일이에요. 적어도 노예와 나로 이루어진 작은 왕국에선 전지전능할 수 있으니까요. 자존감을 채울 길이 없는 건 딱한 일이지만, 남을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단 걸 확인함으로써 그 정신적 빈곤을 해결하는 건 아무래도 비겁합니다. 임시방편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이 방법은 대단히 오랫동안 다양한 양상으로 지속되어왔고, 궁극적으로는 언제나 ‘그래도 되는 일’ 이었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일관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엽전으로, 은화로, 비트코인으로, 성착취 영상이라는 새로운 화폐로 거래되는 몸이요. 자본주의는 남성이 성착취 권력을 실행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영상을 공유하던 N개의 방에서 남자들이 피해자를 노예로 불렀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해요. 철없는 애들이 저지른 고약한 장난이 아닙니다. 돈 수완이 비상한 괴짜들 문제로 한정하는 것도 한참 모자라요. 이건, 아직도 여성을 노예로부터 해방시키지 않은 어떤 의식의 문제입니다.
며칠 전 이곳의 온라인 세계에선 성추행을 겪은 공무원을 관비에 빗대는 댓글이 유명세를 탔어요.* 비서를 성적으로 추행한 혐의로 자살한 전 서울시장을 옹호하기 위해, 관노와 동침한 충무공을 비난할 수 없다는 논조를 내세운 것이에요. ‘관노'란 원래 남자 노비를 뜻하지만, 아마도 여자 노비를 뜻하는 ‘관비'나, 관에 속한 기생을 뜻하는 ‘관기'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글쓴이의 마음속에서 ‘성적으로 침입해도 되는 대상’과 여성이 얼마나 가깝게 위치하는지를 그려보며 아찔했어요. 오래전 고려에서는 유랑하는 천민 계급을 부역에 넣기 위해 그들을 노예로 만들었는데, 여자의 경우 기생으로 등록했다고 해요.** 창기라는 노예, 이 특이한 중첩 속에 엉키어 있는 여성을 생각해보아요. 어쩌면 이들은 욕설 속에 사로잡힌 환향년***의 자매가 아닐까요?
이런저런 일이 수면에 떠오르고 있어요. 전염병은 많은 이를 죽였고 또 고되게 만들었습니다. 이 사회의 기반이 어떻게 열악한지, 차별과 미움이 얼마나 만연해왔는지도 보여주고 있고요. 하지만 선생님! 우리가 자는 곳, 읽는 곳, 쉬는 모든 곳에 작은 평화가 깃들길 빌어요. 그렇게 재생한 힘으로 이 분노를 태웠으면 좋겠어요. 화내고 슬퍼하는 데 들이던 에너지를 우리 각자가 하고 싶던 일에 온전히 쓸 날이 곧 오기를 바라요.
- 사랑을 담아 민주가 보냅니다.
* 온라인 커뮤니티 ‘클리앙'의 한 게시글에 달린 댓글입니다.
“난중일기에서 ‘관노와 수차례 잠자리에 들었다’라는 구절 때문에 이순신이 존경받지 말아야 할 인물인가요? 그를 향해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건가요?”
** 신현규의 『기생 이야기』 5쪽에 이렇게 써있습니다.
“정약용과 이익은 기녀의 문헌 기록을 들어 고려 때에 그 기원을 찾았다. ‘백제 유기장의 후예인 양수척이 수초를 따라 유랑하매, 고려의 이의민이 남자는 노예로 삼고, 여자는 기적妓籍을 만들어 기妓를 만드니, 이것이 기생의 시초다.’” 여기에서 ‘양수척’이란 조선 시대로 치면 백정 신분인 사람들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적’은 기생들을 기록해놓은 목록을 뜻해요.
*** 언제 한 번 히스테리안 계간 3호 『환향년』으로 돌아가 이야기 나누기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거울과 섹스는 세계를 증식시키기에 가증스러운 것이다”(보르헤스)
세계는 매 시대마다 가능한 존재론을 치열하게 탐색한다. 비판가들은 이러한 대안적 존재론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했고, 우리는 그 과정을 역사라고 이해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이러한 비판의 의지가 지속되고 있으며 “수요되는 것만이 살 자격을 얻는 이 자본주의라는 존재론”에 대한 고찰이 그 중심에 서 있다. 그런데 이 비판의 역사는 반복되는 자기 갱신으로 스스로가 놓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 존재론’ 비판이 가치붕괴를 가속화하는 존재 상품화를 비판의 대상으로 세울 때 그 깨어있는 비판자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대립하는 이 둘은 어쩌면 짝패이자 같은 규칙을 공유하는 부르마블 속 경쟁자는 아닐까? 김민주의 「n번째 노예」는 전(前)비판적이거나 비(非)반성적 태도보다 오히려 비판의 토대, 즉 시스템 비판이 가리고 있는 ‘성착취에의 의지’를 밝히고자 한다.
“사이에도 성착취를 향한 의지는 수요-공급이라는 지상법을 어깨에 두르고 살아남잖아요. 이건 특정 취향의 성욕에 관한 문제가 아니에요. 제어할 수 없는 본능의 문제는 더더욱 아닙니다. 단순하게 가부장적 사고관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도 한참 무디어요. 이건 차라리 위계화하는 권력의 문제입니다.”(김민주)
시스템 비판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성착취에의 의지’를 주목하지 않는다. 성착취가 만연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론적 상수가 되었음을 뜻하는 지도 모른다. ‘성착취에의 의지’는 자본주의 도식대로 수요-공급으로 설명되길 거부한다. 이 의지를 단순히 자연적인 성욕(생물학적 본능 환원), 특이 취향의 교환(상품 기호의 등가) 또는 가부장적 인식론(폭력의 특수성을 은폐)으로 보는 것은 문제를 한참 무디게 하는 것이다. 비판과 비판의 대상 모두에 성착취에의 의지가 녹아있다. 그리고 성착취 현상을 설명하는 태도에서 비판의 안일함이 나타난다. 과연 성착취는 도처에 만연한 현상일 뿐일까? 그것은 하나의 거울, 그 반사면을 통해 우리 세계가 구축되는 존재론적 상수이다.
“자신을 우월한 것으로 설정하지 않으면 지금의 자그마한 자신을 지탱할 수 없는, 기생적인 자기 정체화 같은 것이 있는 게 아닐까요?”(김민주)
“노예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귀찮은 일을 대신해줄 수족이 필요해서만이 아니고요. 조아리는 자가 있으면 마주한 자는 두 배로 커 보이기 때문에요. 아마도 그 밑에는 자신의 존재 의미가 부재한다는 데에서 오는 절망이 있는 것 같아요. 거울을 보면 초라한 나뿐일 때, 그 상을 지울 쉬운 방법 중 하나가 노예를 만드는 일이에요.”(김민주)
김민주 작가의 「n번째 노예」는 이 전도된 비판 의식을 지적한다. 여성에 대한 성착취가 세계를 증식하고 확증하는 거울이 된다. 여성이란 거울은 세계·자본주의·비판의 토대가 된다. 그 거울들 속에서 여성은 나쁜년, 미친년, 환향년, 십할년 등으로 끝없이 증식하지만, 역사와 세계는 진보하고 있다고, 자본주의의 가능한 존재론을 모색한다고 말한다.
어깨가 없는 노예 위에 역사가 건립되었다. 세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만큼 거울 속 ‘노예’들도 증식한다. 세계의 시초를 찾고 싶은 역사가 기원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다면, 분노를 불태우길 두려워마지 않아야 한다.
- 히스테리안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