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말을 찾고 있다.
의미 이전에 소리였을 그 말은 검은 깊은 곳에서 시작한다고 알려졌다. 히읗이 그 말의 첫이다. 그건 몸 가장 안쪽에서 떠올라 비어있는 길들을 통과해 올라온다. 길 끝에서 닿게 되는 성문聲門, 두 쌍의 성문이 열리면 그것이 스쳐서 나온다.
다음은 입 뒤쪽의 바닥에 혀를 놓은 채 힘을 빼고 발음한다. 아–, 아– ㅏ–. 낮은 곳에서 밖으로 빠져나와 멀리까지 가는 음이 그 말의 가운데를 이룬다.
이어 몸 밖으로 터지는 끝의 소리는 입술에서 멈칫, 길을 되돌아가 코로 향하여, 열리는 공깃길, 소리는 성대의 진동과 공명에 기대어서 숨으로 빠져나온다.●1)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곳에서 좁은 문을 열고 간신히 기어 나온 다음, 더 큰 문을 통과하기 전에 망설이다가 제 몸이 뿜어내는 증기만을 밖으로 뿜어내고 사라지는 벌레, 끈적이는 타원형의 벌레 같은 모습을 상상했다. 보통 새벽이었다. 닫힌 문밖의 내가 안쪽에서 흘러 나는 소리를 들으며 떠올린 풍경. 거의 돈에 관한 대화였다. 해가 뜰 때까지 빚이 후드둑 떨어졌다. 점점 열기가 뿌옇게 차올랐다. 쓰는 사람들과 갚는 사람이 나눠진 대화였다. 열기를 계속 들이마시는 줄 모르면서 나는 그것이 문을 허물고 나올까 봐, 그래서 대화에 끼게 될까 봐 겁이 났다.
그 열기는 중고품이다. 여럿이 들이마시고 내쉰 그것을 나 역시 들이마셨다. 꾹 닫힌 흰 문과 어두운 방, 나눌수록 줄어들지 않고 더 많아지기만 하는 중고 숨이 내가 찾으려는 단어로 이해해도 될까? 그걸 무엇으로 이름 붙일 수 있을까?
국립국어원은 이렇게 정리한다: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 몹시라는 말은 내 것이 아니다. 다음의 설명도 있다: “과거에 관계된 어떤 일이 해결 불가능, 회복 불가능한 기정사실이라고 자각될 때 일어나는 감정”●3), 회복될 것이 없어서 이것도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이 삭이고 삭여진 다음 스스로 현현하는 모습을 김지하는 흰 그늘이라 부른다. 흰 그늘을 찾아가는 책 첫 문단에서 김지하는 그것과의 마주침을 이렇게 적었다. “남도의 끝 해남에는 어란(於蘭)이란 작은 포구가 있다. 바다도 너무 깊어 언제나 검은빛이었고, 조난이 잦아서 포구 끝에 등대 하나가 서 있으니 눈부신 빛이다. 흰빛과 검은 바다.”●4) 김지하는 검은 물결들을 이를 악물고 삼켜서 오래 쌓으면, 그 “안에 안에 속에 속에 숨어 있다는”●5) 흰빛이 보일 거라 했다.
흰 등대와 검은 바다
그 말을 다시 이르면 백암白闇이다. 白의 모양은
태양이 뜰 때 비치는 햇빛, 闇의 모양은
문 사이의 소리.●6)
나무의 갈라진 피부에 금빛이 얇게 덮인 날이었다. 숲에는 좁은 기다란 굴이 여럿 있었다.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게 창이 가로 세로로 지어져 있었다. 사흘을 은신해 있던 선흘 마을의 사람들이 숨어있다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숨은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올려 총을 쐈을 것이다. 으– 으– 하는 방식으로 목울대가 아팠다. 울대의 통증도 문으로 전해 받은 중고품, 하지만 이건 나를 위해 아픈 내 몸의 감각이었다.
아직 삭여지기에 이른 것들이 거기 있다.
문과 굴 밖에서 봤던 빛들은 아직 표백되지 않았다. 보랏빛을 띠었다가 새카맣다가 붉어지면서 산산조각으로 찢어져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에 있었다. 희어지더라도 그것은 아직 뽀얗고 매끈하기에 일렀다. 싸늘했다.
싸늘한 흰빛은 귀신의 것이다. 여기 나를 쳐다보는 여자처럼.
금빛의 홍채 안으로 흰 동공을 품은 여자다. 이 동공은 산 것들을 고아낸 물처럼 매캐하다. 가스 같은 걸 마신 것처럼 눈이 매워진다. 환상과 초월, 공포와 두려움이 함께 있다. 아는 여자 같기도 하다. 부식된 핏빛을 띤 네 명의 뱀이 저 여자를 두른다. 녹슨 쇠의 빛이 여자로부터 풍긴다.●7)
이 여자를 보면 은박지를 씹은 것 같다. 찌릿한 전류 같은 통증이 입에 고인다. 시큼한 것을 먹었을 때처럼. 시큼한 것은 김치다, 김치는 빨갛고 빨간 건 눈물이다, 눈물은 뜨겁고 뜨거워지면 김이 된다. 뱃속에서 둥글게 굴러 올라오는 그 열기.
나는 어릴 때부터 그 짜고 검고 까끌까끌한 김을 좋아했다. 혼자 앉은 식탁에서 삼켰던 것, 깨끗하지도 매끈하지도 않은 방식으로 듬성듬성 희고 짠 것. 언젠가 숨으로 나올 것. 마시는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들이마셨던 열기처럼 결국
내 것이 된 줄도 모르고 계속 내 것이 될 것. 크고
유일하고 가득하고
넓으며
둥근 소리. ●
미주
1) 허용, 『자연언어 말소리의 체계』, 한국문화사, 2023, 64쪽
2) 위의 책, 22쪽 참고.
3) 신은경, 『풍류: 동아시아 미학의 근원』, 보고사, 1999, 239쪽.
4) 김지하,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 실천문학, 2005, 6쪽.
5) 김지하,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96>」, 《프레시안》, 2003.06.04., 2024.09.18. 접속, https://pressian.com/m
6) <2024 히스테리안 리서치 클럽>(히스테리아 기획)에서 '숨은 신'을 다룬 8회차 함께 한 유은으로부터 어두울 암闇의 모양에 대해 들었다.
7) 천경자의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를 상상하며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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