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작법: 미래를 기억하고 과거를 상상하기 - 안팎




게으르크 루카치는 소설이라는 문학 형식을 두고 “선험적인 고향상실의 표현”이라고 썼다. 더 이상 밤하늘의 별들이 삶의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지 않는 시대, 더 이상 신들의 나라에 비추어 인간의 나라를 이해할 수 없게 된 시대에 등장한 소설이라는 양식은 이미 무너진 세계, 계속해서 무너져 가는 세계에서 자신의 삶을 세우려 애쓰는 무력한 존재의 이야기를 펼친다. 인간에게 익숙하지도 편안하지도 않은 공간이 되어버린 세계 ― 태어나 자라면서 점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이 세상에 당도하기 전부터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세계 ― 에서 소설의 주인공은 부재하는 고향을 찾아 헤맨다. 소설이 성공한 것이거나 혹은 반대로 소설은 쓸모 없는 우회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주의 질서가 보장해 주는 자리는 끝내 되찾지 못했지만 우리는 구태여 소설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찾아 떠나지 않아도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


서류에 적힌 한 줄의 주소가 우리의 자리를 분명히 알려준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국가 ― 정확히는 경찰과 군대 ― 가 우리 자리의 경계선을 든든히 방어한다. 주소들을 표시하는 경계선을 넘을 수 있는 것, 그러니까 어떤 주소들을 제 자리로 삼을 수 있는 것은 특권이다. 이 특권을 가진 이들은 이주민들에게 당당하게 외친다, 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이들이 서류상으로 어떤 지위를 갖고 있는지조차 중요하지 않다. 이상한 방향으로 비대해지는 이 당당함은 어느 쪽을 향해서든 거침없다.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지금의 경계선들 사이에서 충분한 자리를 갖지 못한 모든 이들, 그러니까 경계선을 옮기거나 넘으려 드는 모든 이들을 향해 같은 외침이 울려퍼진다. 우리를 위한 나라는 없다고, 우리에게 국가는 없다고, 이들은 답한다. “환향”을 자처하며 “바깥에서 안으로 회귀하는 여인들”이 그 곁에 있다. 이들은 지금, 머물러 본 적 없는 곳으로 돌아가려 한다.


직접적으로는 물리적인 국경에 초점을 두는 《환향: 바깥에서 안으로 회귀하는 여인들》은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로 관객을 맞는다. 전시장의 소재지이기도 한 접경지대 파주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수십 년 전 전쟁의 기억에 관한 문장들을 지나 방에 들어서는 관객을 가로막는 조말의 〈열망에 기인한 정서적 공간〉은 사이에 틈을 두고 길을 일러준다. 불러세워 안내하는, 보다 무르거나 따뜻한 형태로 재현된 이 군사시설물은 공포와 통제 속에서야 비로소 삶과 자유를 꾀할 수 있는 나의 안전을 상기시킨다. 국민을 고문하고 감시함으로써 국가는 국민의 수호자가 되었다. 군경의 총구는 종종 국민을 향하지만, 끝내는 적을 향할 것이므로, 그들의 등 뒤에서 나는 안전하다.


위협 위에서 완성되는 이 역설적인 안도감 앞에서, 가져본 적 없는 고향을 잃은 자들의 소설이 새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들이 고향을 찾아 혹은 고향으로 삼을 만한 땅을 찾아 떠나는 것은 아니다. 중국 심양의 코리아 타운. 고향을 잃은 이들의 땅, 혹은 고향을 만든 이들의 땅. 스스로를 ‘히스테리안’이라 부르는 이들은 썩 강렬한 메타포가 되어 줄 이곳에 자리한 서점을 찾아 “마음에 집을 짓는 글쓰기”라 불리는 문장들을 찾아 읽었다. 국가와 민족, 이중의 경계 속에 안전하게 들어앉지 못한 채 탐색해야 했던 삶의 자리에 관한 이야기들, 불안 속에 있었기에 실천할 수 있었던 삶의 양식에 관한 이야기들이었을 테다. 이들이 가져 온 문장 하나는 이런 것이다. “집은 그저 그가 잠시 들리는 장소일 뿐이다. 생활이 그가 원하든 안 하든 그렇게 만들어 놓아서 그는 순종할 뿐이다. 세상을 거슬릴 순 없는 것이다. […] 오직 순종만이 최상의 방법이다. 그들이 나타나기 전에 우리는 이 집을 빠져나가야 한다.”


고대 그리스식으로 말하자면 몸 속을 여행하는 자궁에서 기인하는 불안정을 겪는 이들이 여행지에서 가져온 문장이다. 본문에서 떨어져 나온 문장을 마음대로 끊어 읽어도 좋다면, 나는 도망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을 생각하려 한다. 주어진 자리에 뿌리 박고 앉아 내 것이 아닌 것마저를 지켜가며 영문 모를 싸움을 하는 대신 금세 빠져나감으로써 다른 곳에서 도모하는 나에 대해 생각하려 한다. 이와 함께 벽에 걸린 그림을 마음대로 읽어도 좋다면, “나는 지워지고 또 다른 내가 만들어진다”는 문장과 함께 그려진 남하나의 장소들과 얼굴들 ― 옷을 갈아 입는 곳과 바뀌는 얼굴들 ― 에서도 같은 것을 읽을 요량이다. 고향에 매달리는 대신 제 자리를 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자리. 태어난 병원도 첫 퇴원 후 머물렀던 집도 금세 허물렸으므로, 또한 본적지의 주인도 그 마을의 경찰도 나의 편이 아니었으므로, 실은 버릴 고향도 없지만 말이다.


지도를 펴 놓고 찾아갈 수 있는 고향이 없으므로 소설의 여정은 하는 수 없이 시간적인 것이 된다.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이 시간의 여정은 단순히 향수에 그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뻗을 것이다. 이를테면 미래를 기억하고 과거를 상상하며, 갈아 입을 옷과 바꿔 지을 표정을 찾아 볼 수 있을 테다. 심양에서 미래의 어딘가로, 어디에 있을지 모를 수신자에게 보내는 편지들에 발신자와도 수신자와도 면식 없는 이들의 얼굴을 겹쳐 둔 정혜진의 〈부유데기의 환영〉은 표면적으로는 미래를 혹은 후세를 향하지만 단순히 앞선 세대의 유산을 대물림하고 소망을 전가하지는 않는다. 낙인과 자긍심을, 고통과 즐거움을 골라내지 않고 송신함으로써 이 얼굴들과 말들은 더 나은 미래를 구상하고 그 실현을 위한 설계도를 그리는 대신 전과 후로 구분하고 대비시킬 수 없는 시간의 관계, 과거와 미래가 뒤섞이는 틈새를 만들어 낸다. 위험과 안전 사이를 오가며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제 자리를 질문해야 하는, 답을 얻는 대신 또 한 번 질문하기를 반복해야 하는 우리들의 자리다.


심양을 메타포라고 한 것은 대한민국과 심양 사이에 물리적이고 문화적인 거리가 있기 때문, 말하자면 이해를 위해 어떤 도약이 필요하고 또한 도약이 필요하기에 안전하게 단절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전시장에서 심양은 국경 밖으로 끌려간 사람들, 국경 밖으로 도망한 사람들이 한데 모인 땅으로서 호명된다. 그들을 밀어내거나 가로막은 것들을 말하기 위해서는 가부장제와 제국주의, 자본주의, 독재와 같은 여러 개의 단어들이 필요하다. 쉽사리 하나로 묶을 수 없는 이곳을 비유의 한 항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원근법적인 생략을 경유해야 할 것이므로 나머지의 초점을 흐리기 위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이 거리를 사이에 두고, 두 곳은 은유적으로 공존한다.


그러나 소설적인 시간성 위에서 이 둘은 좀 더 가까이 놓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쪽 또한 상대항을 적당히 생략하고 다듬는 것으로 해결될 만큼 이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는 문장은 성폭력의 온상쯤 되는 이슬람 문화라는 것을 국경 안으로 들이는 일에 반대하는 데에도 동원되었다. 떠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자리란 언제나 보잘것 없었음은, 이쪽의 국경 안에서도 충분히 알려진 경험적 사실이다. 변방의 소수민족으로 불리는 대신 조국의 국민이 되고자 했지만 동포라는 허울 아래 시장의 주변부에 놓여야 했던 삶과 가진 것도 지켜야 할 것도 없어 도시로 떠날 자유가 있었기에 불안정노동자가 되어야 했던 삶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설정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둘은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의 과거나 미래로서, 순전한 거울로서 존재하는 관계에 머물지 않는다. 말하자면 중첩되는 옴니버스 같은 형식 속에서 진행되는 소설이다. 혹은 두 상 중 어느 한쪽도 충분히 선명하지 않은 채 겹쳐졌으므로 윤곽들과 면들이 모두 흐리지만 그렇게 함으로써만 완성될 수 있었던 다중노출 사진 같은 것.


실은 어디나가 그러하듯 양자 모두가 어떤 특성으로의 환원을 거부하기에 용이한 비유의 위계는 수립되지 않는다. 오히려 환원되지 않고 정지하지 않는 각각의 움직임들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가 문제가 될 것이다. 이야기의 절정을 향하는 대신 사건들을 에돌며 무너질 탑을 쌓는 서사적 운동 자체가 말이다. 이런 운동으로서 “바깥에서 안으로”의 회귀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다. ‘안’은, 혹은 고향은, 시간을 오가며 갈아 입었던 옷들과 지었던 표정들을 갈무리하기에는 턱없이 비좁은 공간이다. 새 옷을 입기 위해 우선 옷을 벗어야 했듯, 울기 위해서는 미소를 지워야 했듯, 혹은 반대로 어제의 옷을 다시 입기 위해서는 새 옷을 벗어야 했고 미소 짓기 위해서는 눈물을 닦아야 했듯, 어느 한 곳에 가기 위해서는 다른 한 곳을 떠나야 하고 그곳에 정박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겹을 걷어야 한다. 그러나 기억하지 않는 법도 상상하지 않는 법도 알지 못하므로 ― 그것을 알았다면 고향을 꿈꾸지도 않았을 것이다 ― 이 회귀는 나의 방에 당도하는 그 순간 좁은 방을 넘쳐 흐르거나 네 벽을 무너뜨리고 말 것이다.


고향을 말한다는 것은 이미 고향을 떠났다는 뜻이다. 환향한다는 것은 고향 바깥에서의 모든 시간을 짊어지고 고향땅에 들어선다는 것이다. 어사화를 꽂고 금의환향할 때건 환향녀로 불리며 돌팔매질을 당할 때건 말이다. 그곳에 없던 것,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것을 고향에 들이는 일, 그러니까 고향을 더 이상 고향이 아니게 만드는 일, 환향은 그런 일이다. 고향을 잃은 이들, 고향에서 밀려난 이들이 고향을 향할 때 가감 없이 드러나는 이러한 진리는 고향이라는 것이 언제나 기억 속에만 있는, 그러므로 언제나 문자 그대로 미래의 것 ― 결코 도래하지 않을 무언가 ― 임을 역설한다. 변함없이 기다리는 장소가 아니라 쫓겨나간 이들의 시간으로서의 고향만이 우리 앞에 있다. 이를 아는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실은 고향을 거부하는 선언이다. 정당하게 나에게 속할 수 있는, 혹은 정당하게 내가 속할 수 있는 장소란 없다는 선언, 그러므로 누군가가 누군가를 맞이하거나 박대하는 대신, 누군가가 누군가를 향하는 대신, 서로가 부유하며 낯선 자리에서 낯선 이들을 환대하는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의 선언.


불안하기에 가질 수 있었던 자유, 끊임 없는 불안만을 가져다 주었던 그 자유 앞에서만큼이나 무력할 것이다. 하지만 여성에게는 국가가 없다고 외치며 여성의 바깥에서 여성을 위하는 국가를 꿈꾸었던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기꺼운 무력함이다. 여전히 불안은 마뜩지 않다고 해도 말이다. 바깥으로부터 안전한 안에 머무는 삶이 아니라 기어이 안으로 회귀하는 삶, 그러나 바깥으로서만 존재하는 삶을 향한 다짐이다. 장소의 평면을 관조하는 눈을 위협하는, 삐쭉 솟아있는 시간의 돌출부로서의 삶. 전시장 한쪽의 책상에서 말 많은 관객들이 한 줄씩 적고 갔을 이야기는 하잘것없는 소설이 되어 있을 것이다. 예고 없이 열린 불꽃놀이 소리를 듣고 오늘도 또 전쟁을 떠올리며 놀라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의 작은 방에 늘어둔 이 기억과 상상들은, 그런 소설을 영원히 읽고 쓰기 위한 첫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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