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회절하고 저항하는 미디어○ 손혜림

작성자 사진: hysterianpublichysterianpublic

최종 수정일: 2024년 10월 30일



부제: 동학농민운동과 식민지 근대 여성의 문예운동을 중심으로



“다음은 갑주를 갖추고 말 타고 칼춤 추는 자가 하나요, 다음은 칼을 가지고 걸어가는 자가 4, 5쌍이요, 다음은 크게 각角을 불고 북을 치는 붉은 단령團領을 입은 자가 두 명이요, 다음 두 명은 또 호적을 불고 (…)”1)


동학농민운동의 긴박한 상황이 기록된 함평군 보고서는 여러 면에서 기이했다. 춤과 악을 부는 모습에 대한 묘사는 전혀 전시 상황으로 보이지 않았다. 광대와 무당, 재능 있는 천민 즉 광대들로 이루어진 재인부대才人部隊에 대한 묘사는 130년 거리만큼 떨어진 나에게 너무나도 묘연한 질문들을 남겼다. 전장을 나가는 이의 마음엔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전제되지 않는가? 어떤 연유로 신체를 더 단단히 보호하는 갑주가 아닌 붉은 단령, 즉 무예 의복을 갖추고 항쟁의 최전방에 섰던 것일까. 무엇보다도, 칼과 죽창도 아닌 각과 북, 꽹과리를 쥐고 전쟁에 나가던 이들을 추동했던 배후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던 걸까.


재인부대의 몇 가지 기이한 기록들을 검색하며 과거의 이들에게 접속한 꽤 최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2019년 자로 실린 “동학농민혁명 재인부대원 최후 전적지서 첫 추모”●2)기사에는 지전무를 추는 김윤하 예인과 함께 풍물패, 만세삼창을 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전근대 시기 재인부대에 대한 이야기가 어느덧 2019년의 현대에 가닿은 것이다. 동학농민운동과 재인부대 추모제라는 두 시공간 속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나의 감정이 고개를 들었는데, 그것은 당대의 정서를 깊이 헤아리지 못해도 어슴푸레 알 것만 같은 묘한 기시감이었다. 2024년의 나와 2019년 추모제에 참여했던 사람들, 1894년 새로운 시대를 꿈꿨던 운동군 마음 사이엔 연결된 무언가가 정동하고 있었다.


이 모든 추적의 출발점엔 동학농민운동 당시를 상상해 볼 수 있는 기록물인 갑오평비책東匪紀略草藁이라는 ‘미디어’가 있다. 자연스레 동학농민운동의 대표적 상징으로 작동하는 ‘사발통문沙鉢通文’을 다시 살펴보았다. 단순히 시대상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료로 일별하기엔 중요한 무언가가 누락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 글은 누락된 흔적을 쫓는 선로로 연대와 저항의 정신이 내장된 물성적 미디어를 선회한다. 그중 동학농민운동과 식민지 근대 여성들의 문예운동이 활발했던 시기를 짚어본다. 미디어에 함의된 여러 텍스트를 통해 당대의 헤게모니를 해제·회절하고자 했던 시도들을 희미하게나마 되짚으며, 이를 한국의 미의식과 연결 지어 보고자 한다.



가장 오래된 하부미디어로서의 한, 풍류, 신명


서문에서 묘사했던 재인부대의 모습엔 여러 차원의 정서가 교차한다. 전쟁의 전제로서 멸滅과 생동적 도약의 생生을 함께 품으며 그들을 추동했던 배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새로운 세상을 제시했던 후천개벽後天開闢의 희망 뒤편에는 계급제와 봉건제로 인해 압제된 한恨의 정서가 진동했을 것이다. 동시에 동학농민군의 사기 진작을 위한 신명 나는 풍류 또한 감지된다. 생과 멸, 한과 신명, 풍류는 얼핏 동일 선상에서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단어들로 보인다. 쉽사리 해명되지 않는 운동 뒤편에는 그 이전 과정을 향한 하나의 질문에 도달한다. 식민지 근대까지만 해도 말하기 주체가 극히 제한되던 언문 멸시의 시대는 지속되었다. 대중적 미디어라고는 이렇다 할 것이 없던 시기, 충돌하고 양가 하는 정서들 뒤편엔 어떤 미디어들이 사람들을 응집시켰던 것일까.


본고는 ‘전달’에 중점을 둔 넓은 의미로써 미디어를 상정하며 ‘한’과 ‘풍류’, ‘신명’을 사람 사이를 횡단하는 강력한 ‘하부미디어’로 가정해 본다. 특히 ‘한’을 주축으로 촉진된 미디어들을 중점 사례로 살펴볼 예정이다. ‘한’은 일제강점기 비교적 친한파로 거론되는 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에 의해 타자화된 또 다른 식민 미학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3) 하지만 ‘한’이라는 단어에 점철된 고정된 미의식의 고리, 가령 ‘비애미’로 조선인의 정체성을 연결짓던 야나기의 일면 식민주의적 시선을 해제하는 시도 속에서 외려 한국의 미의식 논의를 재점화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 “비애미의 표면 밑에 은폐된 채로 우리 시선의 사각지대에 위치하는 사상적 침전물을 발굴해 내는 작업”4)이 필요하다고 지적되는 바, 초국가적 맥락에서 재배치되는 ‘한국적인 것’에 대한 논의는 그 여느 때보다 절실해 보인다.


하부미디어는 비가시적이면서도 상시 침잠해있다는 가설에 정박해 보자. 상상할 수 있는 차원에서 가장 오래 공명하는 정서들을 '하부미디어'로 정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부미디어’는 각 개개인이 ‘한’이라는 경중을 각기 달리 체감하듯 명확한 번역에 실패하는, 차라리 하나의 상像에 가까운 미디어다. 이는 신문이나 전화기와 같이 가시적인 물성을 가진 ‘상부미디어’가 생성되도록 촉발하는 직간접적 요인으로 작동한다. 그러기에 하부미디어는 상부미디어의 전제이며 수용자로 하여금 하나의 역사적 상흔들을 공유하게끔 한다.


추상적인 정서 혹은 구체적인 상像으로 존재하는 하부미디어는 상황적 원인 탓에 내면을 자극하는 엔트로피에 기민하게 반응하며, 타자와 결속 관계를 맺게끔 한다. 상부미디어는 이렇듯 하나의 사건에 동인이 되는 하부미디어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논의된 ‘원한’이나 ‘비애미’와 같은 몇 가지 단어들로 한국의 미의식을 정의 내리는 것이란 여러 정서들을 하나의 언어에 결박하는 태도에 가깝다. 오히려 무수히 제안되는 파편적 단어들, 번역의 실패, 다른 하부미디어와 결합한 새로운 이형들을 서로 연결 짓는 것이 ‘한’과 같은 하부미디어를 설명하기 위한 근접한 시도일 수 있다. 의도와 의지가 함의되지 않은 사건은 성립할 수 없다. 한의 엔트로피가 신명과 혼재된 모양으로 하나의 사건에 접속했던 재인부대의 사례에서처럼, 하부미디어들은 때론 독립적이고 한편으로는 여러 정서들이 접합하는 방식으로 이항하며 저항적 양상의 상부미디어를 탄생시킨다. 사건별로 달리 들러붙는 정서들, 그리고 그것들이 구체화된 흔적으로 나타난 미디어들을 예시로 삼아 호명되지 않은 미의식의 언어와 상像을 그려볼 수 있다. 


동학농민운동의 대표적인 저항 미디어로는 앞서 언급한 『사발통문』이 있다. 통문은 아주 새로운 형태의 수단은 아니었는데, 주로 유생들이나 향교, 서원, 문중과 같은 엘리트 집단이 공동의 의견을 공론화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했다.5) 전봉준을 포함한 동학농민군은 주도자를 은닉하는 영리한 방식으로 사발 형태의 서명이 담긴 통문 모양으로 변형했다. 이는 기존의 통문이라는 미디어를 차용하는 동시에 저항의 값으로 치환한 운동으로 해석된다. 동학농민운동의 대표적 미디어로 『사발통문』 외에 괘서掛書, 참요讖謠를 들 수 있다.6) ‘괘서’는 후에 1980년대 민중미술의 걸개그림과도 엇비슷한 측면을 가진다. 마을 벽체와 같은 공공장소에 붙이거나 장대에 거는 방식으로 출몰하는 게릴라식 괘서는 지배층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표현하는 수단이었다.7) 1893년만 하더라도 일본 공사관 등을 포함해 제도적 비판이 담긴 4종의 괘서가 붙었다. 가볍고 빠르게 생산되는 『사발통문』은 편지이자 동학군의 선언문이었고, 동시에 신문이라는 미디어로 기능했다. 이에 더하여 괘서 또한 불특정 다수를 향하는 전략을 취했기에 절대다수였던 피지배 계층을 향해 노출되며 조선인들의 깊은 하부를 자극했을 것이다. 기득권의 언어였던 한자가 아닌 한글의 보급도 운동의 변곡점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언문으로 천시되던 한글은 사발통문 이후에도 소통의 주요 언어로 쓰였으며 조선 여성들의 지속적인 사용으로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종이와 같은 물리적 매체에 들러붙지 않는 ‘참요’라는 소리 형태의 미디어다. 노래 형태의 미디어는 그 어떤 미디어보다 가볍고 입이라는 신체와 기민하게 맞닿는다. 감정의 계보가 신체에 직간접으로 각인되는 방식으로 불리는 것이다. 참요는 동학군의 정치적 의도가 그 노랫가락에 녹아있었을 뿐 아니라, 애도하고 규합하는 감정이 결합되어 있는 민요이기도 했다. 예컨대, 동학의 신앙가사집을 엮은 『용담유사龍潭遺詞』의 노래부터 다양한 변용성이 돋보이는 최제우의 ⌜칼노래⌟가 있다. 더불어, 동학농민운동의 대표적인 노래로 꼽히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전봉준과 재인부대의 선봉장이었던 손화중이 처형된 한스러운 배경 속에서 불렸다. 가락과 가사가 지역별로 일부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각기 다른 버전의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하나의 공통된 제목과 정서로 그려지며 지금까지 구가 되고 있다.


참요의 특기할 점은 앞서 정의했던 물성을 가진 상부미디어 혹은 한, 신명, 풍류와 같은 하부미디어처럼 하나의 적확한 분류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상·하부미디어의 중간계를 떠도는 하나의 포자처럼 가라앉고 부상하는 모양새로 다양한 미디어와 사람, 물질 사이의 경계를 부유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물질적으로 인지 가능한 차원에서 ‘몸’을 상부미디어로 참조했을 때, 참요는 하부미디어의 특정 정서와 접합해 소멸하지 않고 생동하는 형태로 그 계보를 잇는다고 볼 수 있다. 예로 앞선 ⌜새야 새야 파랑새야⌟에서 전봉준으로 상징되는 녹두꽃은 후에 민중가요로 대표되는 김광석의 ⌜녹두꽃⌟으로 부활한다. “칼춤을 추며 흉한 노래를 불러 퍼뜨리고 태평한 세상에서 난리를 도모하고자 은밀히 도당을 모은다.”8)는 최제우의 처형 선포문에서 알 수 있는바, 하부미디어와 함께 미디어로서의 몸이 동원되는 노래 형태는 시대를 막론하고 그 영향력이 실질적인 것이었으며, 농민들을 행동하게 하고 위로했던 전염성이 강한 미디어임을 엿볼 수 있다.



하부미디어의 갈라짐과 새로운 미디어 계보의 시작


동학은 주지하듯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기치로 만물 평등을 외치며 새 시대를 여는 초석을 다졌다. 여기서 ‘만물’은 그 단어가 담보하듯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의 모든 것을 아우른 개념인 ‘물물천 사사천物物天事事天’을 의미한다. 최제우는 인내천 사상에서 더 나아가, 여자, 어린이, 천민 모두를 아우르는 ‘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개념을 확장하며 동학사상의 에코페미니즘적 면모를 비추었다.9) 하지만 봉건제의 해체, 여성 인권 신장 등 희망적 시대를 향한 시도들과 기대감은 국권 침탈을 시작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1899년 처음으로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고, 1900년대 초 소리를 담는 유성기가 도입되는 등 미디어 생태계는 빠르고 속도감 있게 다변화되었다. 그럼에도 종이는 여전히 그 접근 가능성과 정치적 행위를 손쉽게 담을 수 있는 강력한 미디어였다. 명확한 물성을 가진 미디어로서 인쇄물은 총독부에는 ‘교화’를 위한 통치 수단으로, 조선인에게는 계몽과 민족의 자주성 확보와저항의 수단으로서 첨예한 교전을 벌였다. 주지한 사실로 『독립신문』(1896)과 『황성신문』(1898)을 대표적인 신문 미디어들을 들 수 있다. 


한편, 이러한 피식민자의 정체성 논의 이전에 또 다른 한이 존재했는데, 바로 식민지 근대의 복합성이 고스란히 체현되는 여성의 ‘몸’이었다.10) 다양한 사상과 계몽 교육의 최전선에 있던 ‘신여성’에게는 독립에 대한 열망뿐만 아니라 가부장제 아래 제한되는 몸의 탈식민화도 중요한 사안 중 하나였다. 근대라는 상황 속 ‘주체성’과 ‘정체성’ 개념의 부상은 욕망의 다공성을 의미했고 이는 근대 여성들에게 새로운 이념의 등장이자 계몽으로 인한 또 다른 결속적 의미에서의 한이 나타났음을 시사한다. 즉, 동학농민운동 시기에 비교적 공통적 정서였던 한은 식민지 근대를 맞으며 분절하는 양상을 보인다. 식민지 근대 담론에서 주로 화자 되는 ‘식민성’은 여성들에게는 민족 차원의 식민화뿐만 아니라 현모양처 표상과 같은 몸의 식민화로 다중의 압력을 가중했다. 말하자면 여성의 몸은 삼중 혹은 그 이상의 억압 기제들이 혼재되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과 대안이 펼쳐지는 장場이었던 것이다.


모성성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찬양과 가정성에 대한 강조가 페미니즘 계보사에 있어 외려 그 운동의 황금기를 이끌었듯이, 식민지 근대 여성에게 미디어의 ‘창조’는 곧 저항하는 수행적 행위였다. 1930년대 초반까지도 ‘시’, ‘서’, ‘화’가 주요한 문예 양식으로 존재했는데 이런 사의적寫意的 문인 문화에서 여성은 창작자로서 활동하기는 커녕 그림의 대상으로도 쉽사리 그려지지 않아 여성 재현 전통이 핍진한 상태였다.11) 이러한 질곡 속에서 근대 미디어 지형의 변화는 여성을 적극적인 창작자로 변모시켰다. 비합리와 부당함을 향한 ‘저항’ 정신의 부상은 여성에게 일어난 근대 사회의 중요한 변화 중 하나였다.12) 고착화된 문화에 저항하는 테제이자 계몽, 표현의 수단으로 상부미디어는 점차 점유되고, 하부미디어는 더욱 각기의 공감을 깃대로 분절해 나갔다. 다만 이러한 양상은 조선인으로서 공유하는 하부미디어를 단순히 분열, 절개한 것이 아닌, 삭제된 것들을 봉합해 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1910년대에는 일본의 엄격한 검열로 인해 자체적 미디어를 창간하기 어려웠다. 그렇더라도 탄압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운동은 계속되었다. 나혜석, 허영숙, 김덕성(이후 황에스터)이 참여한 일본 여성 유학생 모임인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는 1917년 『여자계女子界』를 발간한다.13) 『여자계』는 조선인 여성이 여성 의식 진작을 목적으로 창간됐으며, 식민국의 한복판에서 조선 여성 독자를 향한 과감한 움직임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1920-1930년대는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애국 계몽 운동과 더불어 여성 교육 운동이나 기관 설립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아쉽게도 『주부의 임무』(1935), 『이상의 주부』(1924) 표지 속 도해에서 확인할 수 있듯 ‘가정’이라는 범주 하에 여성을 향한 교육의 방향성은 일면 제한적이었다. 시대가 요구하는 ‘어머니’ 양성을 위한 실용적 교육이 주를 이루었던바 여성들에게 있어 초기 근대 교육은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울타리 내에서 허용됐다. 


이런 분위기와는 역설적으로 '자유연애'가 1920-1930년대의 주요 화두이기도 하였다. 남성에게 ‘자유연애’는 ‘모던보이'의 표상이었으나, 여성의 차원에선 문제적이었다. 김명순, 김일엽, 나혜석으로 대표되는 당대 ‘신여성’들은 자유연애뿐만 아니라 ‘정조’라는 유교적 사상에 적극적인 문제 제기를 이어왔다. 예로  김일엽은 1920년 3월에 『신여자』를 표제로 여성 운동을 독려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한 잡지를 창간했으며, 나혜석은 미술교육기관인 ‘여자미술학사女子美術學舍’를 설립해 교육과 신사상의 전파로써 그 채널을 적극적으로 넓혀갔다. 상상컨대 ‘한’이라는 하부미디어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제하는 헤게모니를 분해하는 방식으로 공유됐을 것이다. 이러한 제반을 토대로 자체적 미디어 창간과 함께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잡지, 선언문 배포를 지속하며 그 나름의 상부미디어 조류를 개척했다고 평가해 볼 수 있다.


이후, 『부인』(1922) 게재의 일환이자 상대적으로 지속적인 발간지였던 『신여성』(1923)은 적극적으로 여성이 드러난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고 있다. 『신여성』은 교양 지식뿐만 아니라 여성 노동과 같은 사회적 진출 등 여권 신장에 기여한 잡지로 거론된다. 기존의 권위적 언어인 한문이 다루었던 장르를 벗어나 전설, 민담, 괴담과 같은 근대 문예물을 통해 다양한 혼종물을 배치했다.14) 서사를 펼쳐놓고 전시하는 장으로서 글과 그림은 전래와 다른 방식으로 근대 여성들의 욕망을 이식시키고, 다양한 여성의 내러티브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다만, 『신여성』 표지를 통해 이미지 소비 시대에 대상화된 여성의 신체 이미지가 어떻게 현재와도 이어지는지 견지할 수 있다. 예로, 『신여성』 표지를 다수 그렸던 안석주(1901-1950, 아명 안석영)는 서양화를 배운 이래 다양한 모더니즘 양식을 구사할 수 있었던 인물로 평가받지만,15) 한편으로는 서양 문물에 비치는 여성의 신체 비례를 억지스럽게 실제의 몸에 덧대며 또 다른 식민지화를 재생산했다고 볼 수 있다.16) 『신여성』 뿐만 아니라 『별건곤』의 몇몇 표지들을 통해 이런 정박된 이미지의 형태를 가늠해 볼 수 있는데, 이는 여성의 몸이 ‘서구 문명에 대한 선망과 좌절, 욕망을 투영하는 담론의 장’이었음을 시사한다.17)


여성의 몸을 향한 서구 문명의 어색한 이식과 또 다른 식민화 전략, 동시에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힘들이 가세했지만 여성을 향한 이미지가 속절없이 전시되진 않았다. 나혜석(1896)과 나상윤(1904)의 작품들은 그 폭압적 정상성에 항거하는 장치들로서 이미지를 대치한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이 그려내는 여성에 대한 묘사, 특히 ‘몸’에 대한 이미지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여성상과는 사뭇 다른 상을 제시한다. 


나혜석의 자화상〉(1928 추정)은 그 화풍과 얼굴의 묘사로 인해 ‘서구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작품이지만, 그림이 담아내는 구체적인 형태보다는 어두운 배경에 그늘진 얼굴과 번역할 수 없는 상像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또한 『신여자』 4호(1920)에 실렸던 나혜석의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은 기성 문단과 현실 속 여성상을 향한 하나의 풍자적 일침이었다.18) 이 네 컷 만화에는 소설가이자 여성운동가였던 김일엽의 일상과 그 흐름 속에서 표현된 얼굴들이 그려져 있다. 만화 속 김일엽은 과도할 정도로 눈웃음을 짓고 있으나 입은 그와 상반된 형태를 보이는 해학이 담겨있다. 나혜석 특유의 아이러니한 표정 묘사는 비련의 여자라든가 희생적 모성상에 한정된 편향적 이미지들을 굴절시키려는 시도였다.


한편, 나상윤의 〈누드〉(1927)는 잡지 미디어에서 비근히 등가 시키던 ‘여성=젊음’이란 명제를 비껴가 중년 여성을 화폭에 호명한 사례다. 〈누드〉에 그려진 여성은 모던걸의 일방적 도상인 완벽히 차려입은 모습이나 심하게 굴곡져 가학적으로 보이는 신체 이미지들과는 거리가 있다. 그림 속 여성은 어느 한 단어로 집약되거나 섣불리 언명할 수 없는 얼굴, 늘어진 가슴과 배를 담은 나체의 모습으로 고스란히 화폭에 담겨있다. 미디어 속 전형성에 엇나가는 나상윤의 묘사는 ‘신여성’이라던가 수줍거나 당찬 ‘모던걸’로 일축되는 근대 여성 개념에 대항해 반대급부의 층위를 생성한다. 이러한 분절화된 이미지 제시는 쉬이 정의되지 못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포괄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한’은 결속의 미디어로서 그리고 강력한 하부미디어로 작동한다. 근대 사상들이 제안하는 청사진에는 전복의 가능성이 진동했고, 그것이 지연된 미래였을지라도 구체화하는 시도들은 계속됐다. 이런 맥락에서 『활부녀』(1926 창간 추정)는 슬픔 혹은 비애로만 집약되는 고정된 한의 여성상을 이탈해 나간 사례다. 그중 6호(1927.5.) 표지 모델 속 여성의 시선은 표지 밖으로 이탈하는 시선이 아닌 정면을 곧바로 응시하는 묘사와 구도가 독보적이다. 모던걸을 ‘못된걸’과 같은 조롱 어린 단어로 적대하던 시류 속, 『활부녀』19)는 연대 의식으로 모인 부녀들의 세상을 제언했다. 주로 교육에서 가장 소외된 부인들을 대상층으로 했던 잡지였던 만큼, 근대의 파고 속에 밀려오는 사상들을 스스로 판단토록 권고하고, 그 속에서 제반 부녀들 간에 서로 동지가 되어 갈 것을 촉구했다.


정치적 이분법을 떠나 여성이라는 공통 분모로 모인 근우회의 신여성들은 『근우』(1929)를 발간한다. 『근우』는 여성 인권과 그 의식 개혁을 위한 계몽적 수단이었다. 또한 남성 지식인들과 함께 해방 운동을 전개하며 두 갈래의 저항 의식을 모두 내장한 잡지였다. 여러 갈래의 여성 자아를 탐색하는 항로와 적극적인 사회운동의 주체로서 여성을 제시해 나갔다. 사회 운동 전개에 있어 구성원이라는 참여 의식과 자기 동일시는 근대적 여성 정체성 형성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20) 요컨대 식민지 근대에 이르러 하부미디어로서 ‘한’의 분절은 남과 여라는 이분법적 구조로서 물 가르듯 나눠지기보다는 이렇듯 하나의 목표로 합류하고 다시 여러 갈래의 수로水路를 터놓는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볼 수 있다.


기생조합인 권번券番의 기생들이 모여 창간한 독보적 미디어도 있다. 오래된 한이란 뜻의 『장한』(1927)은 관기 제도의 소멸 이후 소외계층으로 배제되었던 기생들이 발간한 잡지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21) 잡지에는 단순한 억울함의 토로가 아닌 기생의 삶을 자아낸 제도와 사회를 비판한 글이 게재됐다. 이들은 기록성을 가진 사진 매체를 적극 활용했다. 비애와 낙관 등으로 범주화되는 여성상의 범람 속에 텍스트의 주체인 필진 본인들을 있는 그대로 사진에 드러냈다. 『장한』 1호는 특히 그 표지가 인상적인데, ‘동무여 생각하라 - 조롱 속에 이 몸을’이라는 글과 함께 본인들이 해석한 ‘한’의 정서를 ‘사진’으로 남겼다. 사진엔 새장 속에 기생이 갇혀있는 모습이 담겨있다. 내지엔 여러 필자가 쓴 글이 실려있는데, ‘울음이라도 울어보자’, ‘지금부터 다시 살자’와 같은 글들이 실려있다. 제목이 내재하듯 오래도록 풀리지 않는 한을 술회하는 동시에 시대가 생산하는 모순을 소외된 계층의 입장으로 적극 설파한 상부미디어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본 소고는 인쇄물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의 저항 사례를 매우 핍진하게 정리해 그 분명한 한계점이 있다. 지면에서 모두 담지는 못했지만 잡지 외에도  『여권통문』(1898), 애국부인회의 『대한독립여자선언서』(1919), 『동아일보』에 게재된 ⌜여성에 대한 일제차별금지⌟(1929)와 같이 비교적 주류 미디어 내에 목소리를 낸 흔적들도 존재한다. 이런 맥락에서 회절하려는 움직임의 저항 미디어들이 폭넓게 연구돼야 할 것이다. 저항적 미디어 연구와 상상적 내러티브의 전개는 비단 상부미디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빨래터와 같은 여성적 공간들도 포괄한다. 역사적으로 가시화되지 않은 장소와 몸 그리고 언어로 응집되지 않은 정서들을, 밝혀지지 않은 미디어의 자장 내에 포함해야 할 것이다.



대안과 저항으로서의 하부미디어 소환하기


한국의 미의식 탐색 동인에는 피식민자의 위치에서 지켜내야 했던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동했을 것이다. 문화적 자원은 사회운동의 틀을 구성하는 과정을 이루는 주요한 공적 담론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22) 이런 맥락에서 고유미를 정립하고자 했던 시도들은 어쩌면 필연적이었으리라. 예컨대, ‘조선적인 것’을 고민했던 김복진을 필두로 ‘멋’설을 제시한 고유섭이 있었다. 미술동인회 중엔 나혜석과 백남순이 동참한 고려미술회가 있었다. 이들은 “조선의 미술, 특히 나려羅麗 시대의 고유한 미술을 회복하여 개척할 목적을 가지고 동인체”23)로서 한국의 미의식을 탐지했다. 더불어, 문단에선 소설가 이태준, 화단에선 김용준이 동양정신주의 예술론을 주창했다.


지속해서 논의되는 한국의 미의식을 동시대에 톺아보는 것이 어느 면에서는 어렵고 전통이라는 과거를 기약 없이 유영하는 철 지난 이야기와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미의식을 찾는 행위는 여전히 유효하다. 동시대에서 ‘한국적’이라는 말에 내포된 민족적, 지정학적 경계는 근대와는 또 다른 정의에 놓여있다. 현재에 배제되고 지워진 이들을, 하부미디어를 공유하는 ‘우리’들로 포섭하고 연대해야 한다. 이 정서가 각기 다른 차원에 놓여있어 실패하고 미끄러지더라도 오히려 그 행위 자체에서 파생되는 미의식들을 포착하고 재정의해야 한다. 본고에서는 하부미디어의 예시로 ‘한’을 주로 다뤘지만, 이는 언제든 재맥락화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새로운 단어들이 생성될 수 있음을 견지해야 한다.


‘K-’로 점철되어 국경을 가로지르는 케이팝, 케이드라마와 같은 문화적 파고 속, 한국은 지금 매우 중요한 분기점에 놓여있다. 1960년대의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은 전 세계의 대중음악 씬을 서구권의 팝 문화로 압축해 온 도화선이 되었으며, 다양한 장르가 성행하는 지금을 차치하더라도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영향력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점을 주지하며, 빠른 속도로 부상하거나 남용되는 ‘K’가 ‘국뽕’이라는 또 다른 민족주의적 마취에 젖지 않기 위해 역설적으로 다시 지금, 한국의 미의식을 진단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한국‘적’이라는 고유성에 매몰된 탐색을 지양해야 한다는 점이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의 정체성을 슬픔, 비애와 연결 지어 대상화된 시선과 한국의 미의식에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던 점을 견지하며, 또 다른 문화식민주의를 위시한 권력 재생산을 유의해야 한다. 번역할 수 없는 정서들이 모이는 장場, 견고한 것에 저항하는 장, 공감과 연대를 기반으로 각기 다른 오독이 가능한 장으로서 한, 풍류, 신명 등을 역산해야 한다.


한국의 특수성이라 여겨졌던 것이 오히려 보편적인 정서로서 서로를 쉬이 연결하며 작동되는 미래를 상상해 본다. 이는 문화권과 젠더, 계급을 막론하는 기제이자 탈식민주의를 위한 대안적 담론으로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 동학은 인간-비인간 경계를 문지르고 만물에 깃든 것을 살피며 동학교도가 아닌 타 종교인들 또한 포섭했다는 점을 주목해 보자. 맺히고, 서리고, 쌓이는 물의 속성으로 비유되는 ‘한’恨의 정서들이 모든 땅을 적시며 연결되는 미래를 구체화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


 

미주

1) 황현(黃玹), 이민수(李民樹) 옮김, 「東匪紀略草藁」, 『東學亂』, 을유문화사, 1985, 183쪽;  노동은, 「동학의 음악」, 『역사연구』28호, 2015, 20쪽에서 재인용.

2)  소인섭, 「동학농민혁명 재인부대원 최후 전적지서 첫 추모」, 

《쿠키뉴스》, 2019.09.01., 2024.09.16. 접속, https://kukinews.com/

3)  정헌이, 「1970년대의 한국 단색조 회화에 대한 小考: 침묵의 회화, 그 미학적 자의식」, 『한국 현대미술 다시 읽기 III Vol.2』, ICAS, 2003, 357쪽 참고. 

4) 박규태, 「야나기 무네요시의 비애미와 ‘모노'-모노노아와레와 한(恨)의 미학 서설」, 『일본사상』제39호, 한국일본사상학회, 2020, 69쪽.

5) 이상희, 『조선조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현상연구』, 나남출판사, 1993 참고.

6) 정일권,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와 동학운동 과정에서의 커뮤니케이션 요소 분석」, 『한국언론학보』, 제54권 6호, 한국언론학회, 2010, 81-102쪽 참고.

7) 조광한, 『소통하는 우리역사:  발로 찾아 쓴 동학농민혁명』, 살림터, 2008 참고.

8) 「劍舞 唱播凶歌 平世思亂暗地聚黨」, 『日省錄』 高宗 元年 甲子 二月 二十九日條』.

9) 최문형, 「에코페미니즘과 동학사상의 모성론」, 『동학학보』제18권, 동학학회, 2009, 81-108쪽 참고.

10) 태혜숙 외, 『한국의 식민지 근대와 여성공간』,여이연, 2004, 21쪽 참고.

11) 국립현대미술관 엮, 『신여성 도착하다』, 미술문화, 2017, 19쪽 참고.

12) 전경옥 외, 『한국여성 정치사회사1: 개화기-1945년, 한국여성근현대사1』, 숙명여자대학교출판부, 2004, 163쪽 참고.

13) 서유리, 『시대의 얼굴: 잡지 표지로 보는 근대』, 소명출판, 2016, 131쪽 참고

14) 김경연, 「근대문학의 제도화와 여성의 읽고 쓰기:『신여성』을 중심으로」, 『코기토』제66권, 부산대학교인문학연구소, 2009, 111쪽 참고.

15) 서유리, 『시대의 얼굴: 잡지 표지로 보는 근대』, 소명출판, 2016, 164쪽 참고.

16) 이는 안석주가 그린 『신여성』표지 뿐만 아니라,『조선일보』1930년 1월 12일자로 실린 안석주의 ⌜여성선전시대가 모녀(2)⌟에서 여성들의 다리 그림에 그려진 글과 함께 비슷한 비판점을 불러일으킨다. 삽화 속 여성들의 다리에 “나는 실경질입니다. 이것을 리해해주어야해요.”,”나는 처녀입니다. 돈만 만흐면 누가나 조하요.” 등과 같은 텍스트와 함께 그림 오른편에는 “『녀성푸로파간다-시대가오면』하고서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 괴상한 일이 만흘 것이다 (…) 다리-녀자의 다리는 더욱더 사나희의 눈을 끌기에 너무도 아름다워진다. 그래서 지금에는 얼골보다도 그 다리가 정을 끌고 야릇한 충동을 준다.”와 같은 여성을 향한 대상화가 드러나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17) 국립현대미술관 엮, 『신여성 도착하다』, 미술문화, 2017, 19쪽 참고.

18) 예로, 염상섭의  『너희들은 무엇을 어덧느냐』(1923)에서 묘사된 ‘덕순’에 대한 묘사가 있다. 덕순은 결혼 이후, 추문을 일으키고 문란하고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경박한 내면의 소유자로 남성적인 시선에서 끊임없이 몰아가는 양상을 보인다.(정혜영, 「신여성, '너희들은 무엇을 어덧느냐」, 《매일신문》, 2017.06.10., 2024.09.16. 접속, https://www.imaeil.com, 참고)

19) “1926년 8월 전후 활부녀사에서 발행한 월간여성잡지로 1926년 8월호 이후 1927년 10월호까지 발행되었다. 활부녀사에서는 여성들이 이상적인 가정을 경영하되, 지식을 갖추고, 정신적·물질적으로 자진(自進)하며, 신사상에 대한 판단력을 육성할 수 있도록 계몽하기 위한 잡지를 편집하였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 ‘활부녀(活婦女)’)

20) 태혜숙 외, 앞의 책, 47쪽 참고.

21) 『장한』1-1호는 현담문고 홈페이지에서 디지털복사본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  http://www.adanmungo.org/view.php?idx=17590)

22)  임희섭, 『집합행동과 사회운동의 이론』,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9, 156쪽 참고.

23)  「미전의 권위를 독점한 고려미술원」, 『매일신보』, 1924.06.06.




CONTACT

instagram @ artyiscoolcool


조회수 69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Comments


© SINCE 2018 Hysterian. All rights reserved.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