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추방된 한, 각인된 한의 경계넘기거부와 위반이라는 금기, 지연과 소거를 넘어서서
그러니까… 제가 ‘히스테리안 리서치클럽’을 함께하며 가졌던 개인적인 불만은 한을 이미지적으로만 소모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우리는 중년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나의 어머니에 대한 사례, 서적에서 볼 수 있는, 다른 누군가의 작업에서 바라볼 수 있는 한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그렇기에 한이라는 것의 독해가 굉장히 중년 여성적인… 감히 젊은 한국인 시스젠더 남성인 내가 해당할 수 없고, 말해질 수 없는 당사자성 없는 단어처럼 다가왔습니다. 미끄러진다는 표현을 요즘 참 사람들이 많이 쓰더군요. 정확히 이런 상황에서 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오리지널 텍스트가 네 안에 있는데 왜 멀리서 진리를 찾느냐’는 양명학의 말씀처럼.
사실 몇 달은커녕 10번도 채 만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한이 뒤섞인 과거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무어라 나무라고 싶지 않습니다. 어둡다거나 치부라 일컬을 수 있는 것들을 숨기는 것은 단점 잡히지 않기 위한 생존 본능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가장 빠르고 미끄러지지 않는 길을 택했습니다. 동양철학이 서양철학에 비해 무언가 더 신비스럽다거나 영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설명되어 온 것에 대한 피로 때문일까요? 안전하지만 자꾸만 미끄러지는 것 같은 공동체가 답답했습니다. 자신의 사례를 살피는 것은 꽤 빠르게 자폐적인 길로 향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겠습니다만, 한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 불변하는 한국인의 민족 정서가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적 환경에 따라 함께 변화하는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또 개인적인 것이 사회적이고 사회적인 것이 개인적이게 된다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전진하기 위해 무슨 선택을 하겠습니까? 미끄러지진 않지만 위험한 길과 안전하지만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길 중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먼저 저의 이야기를 내어놓습니다.
안녕. 이 이야기는 하나의 고백이야. 한국인들은 독일어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야. 한국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해서 올릴 예정인데 그 이유는 한국인들이 내 책을 읽을 때 한국어로 읽으면 빠르게 읽어 내려갈 수 있기 때문이야.
이것은 나의 일부. 나의 과거 이야기야. 독일어로 위장되었으면 좋겠어.
이것을 독일어로 번역해 주라. 부탁해.
안녕하세요. 당신의 이야기는 매우 무거운 고백이네요. 제가 최대한 신중하게 독일어로 번역해 드릴게요.
Ich bin ein Opfer von Schulmobbing.Es war zu Beginn des zweiten Semesters im ersten Jahr, als es passierte.Die Menschen verabscheuen die Grausamkeit der Täter von Schulmobbing.Aber was mir am meisten Angst gemacht hat, war das Schweigen.Keiner der Lehrer in der Schule half mir.Ich hörte, dass selbst die Lehrer, die versuchten zu helfen, die Schule verlassen mussten.In einem Internat, in dem alle Schüler zusammenlebten, halfen mir weder Freunde noch ältere Schüler noch Lehrer.Stattdessen hörte ich sogar Dinge wie: „Hast du nicht auch einen Fehler gemacht?“ oder „Warum willst du das so groß machen?“.Ich litt fast drei Jahre lang an Depressionen und dachte oft daran, alle zu zerstören.Ich hasste sogar meine Mutter, die einzige Person, die auf meiner Seite war.Denn sie war das einzige schwache Wesen, das ich kontrollieren konnte, da niemand sonst mir half.
이 문장을 책에 싣는 데에 잘 쓰이길 바랍니다.
독자의 정신건강을 핑계로 더 묘사하고 싶지 않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었는지는. 그 사건이 지배적이지 않은 삶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마 제 몸이 완전히 바뀌기보다는 성장과 동시에 뒤틀렸을 겁니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그 사건을 제 탓 혹은 운명으로 돌리고 스스로를 살리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써야 했습니다. 정확히 구분하자면 명확한 가해자가 없기에 모두가 가해자이거나 모두가 가해자가 아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의 모두를 미워할 수도 없는 셈입니다.
그 과거를 말해봤자 이득 볼 것은 없습니다. 최대한 정상적인 학창 시절을 지닌 몸인 척 타인 앞에서 나는 나의 뒤틀린 채 성장한 몸을 항상 교정해야만 했습니다. 감당할 수 있는 길만 걷고 싶었습니다. 그렇기에 침묵 되고 삭제되어 왔습니다. 그 사건이라는 폭력에서 저의 육체를 보존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 몸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소각해야만 했습니다.
제게 한은 그런 것입니다.
귀를 막아버리고 싶은 것,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것,
마주하지 않기 위해 다른 길을 기꺼이 택하고 싶은 것,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것.
같은 한국 사람인데 저라고 뭐 다르겠습니까.
실제로 저는 이 이야기를 당시의 상황을 함께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잊어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어떤 과거가 있든지 간에 숨겨서 초연해 보이는(어떤 일에 얽매이지 않고 태연하고 의젓한) 얼굴을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미덕이고 저에게도 미덕이었으니깐요.
그리고
누가 다사다난한 삶을 지나온 사람을 좋아합니까?
누가 학교폭력 피해자를 좋아합니까?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 피해자입니다.” 라고, 말할 때 생기는 표정과 그 이상한 분위기.
재치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나, 펄떡이는 기억을 다시 꺼내고 싶지 않은 나, 기억을 박제된 활자로 펴내어 책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전라를 노출한 것 같은 나, 그러나 말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나, 침묵하고 소극적이었던 나, 하루 종일 혼자였던 나, 어두운 방에 누워있던 나. 그 시기를 통째로 소각시키고 싶었던 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어른이 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사실 이런 이야기를 글로 써도 될지 의견을 구하거나 허락을 받고 싶은 쪽은 원고를 최종적으로 맡아줄 히스테리안이 아니라 저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이 이야기를 공식적인 자리에서 꺼냄으로써 스스로 가시화, 긍정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것은 2024년 2월 순천에서 몇 남지 않은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한 친구와 떠난 여행에서였습니다.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여느 때처럼 술을 마시고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담배를 피우면서 웃긴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에 왜 그때 나를 도와주지 않았냐고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도와주지 않았던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데도.
무언가 남아있음을 그때 처음 감각했습니다. 17살의 어른이 되지 못한 내가 지금의 내 안에 익사한 시체처럼 떠 있는 모습을.
한을 생각할 때 기억처럼 ‘떠오른다’가 아니라 폭력적으로 ‘습격한다’는 표현이 더 맞았습니다. 종종 이야기하거나 특정 상황이 되면 제 목소리와 손이 떨리고 감정이 격해지는 상황이 발생했었습니다.
슬펐습니다. 내가 왜 그 사건을 내 탓 혹은 운명으로 돌리고 스스로를 살리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써야만 했는지. 명확한 가해자 없는 그 시기의 나를 그래서 다들 왜 내버려뒀었는지.
이제는 더 이상 어딘가에 털어놓지 않으면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그 사안을 완전히 졸업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저는 1월부터 조경재 작가와 박유라 안무가의 공동 기획 작업에 한 명의 작가로서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공연 준비는 엄청난 정서적 지지에서부터 비롯되어 진행되었기 때문에—시각 예술계의 대선배 그리고 관객석과 무대의 관계에서 마주했던 제일 좋아하는 안무가의 지지를 받을 엄청난 기회였기 때문에 공연을 통해 졸업하고 싶었습니다. 또 공연이라는 안전한 방식이 구미를 당겼습니다. 퍼포먼스를 모르고, 또 딱히 배운 적도 없는 제게 퍼포먼스가 어떤 의미가 있냐고 묻는다면 관객들로 하여금 허구와 진실을 유연하게 섞을 수 있는, 약속된 무질서 속으로 초대할 수 있다는 이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공연을 제삼자로 마주한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에 모르겠으나 저는 그 공연을 상당히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공연으로 기억합니다. 이는 제가 그런 공연을 바랐기 때문에 그렇게 기억하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당시 저의 목표는 아래와 같았습니다.
“모든 사람과 사건, 감정, 장소들이 오갔던 몸, 경계의 내부도 외부도 아닌 혼종적 영역이자 다른 한편으로 내부이면서 외부인 중첩 지대로서의 몸에 집중하며 검열이 요청되어 왔던 이야기로 몸을 감쌉니다. ‘타자에게 설명되기’ 위한 안정적 자아와 안정적 상황이라는 이름 아래에 스스로를 붕괴시키고 검열을 거침으로써 통치하고 제어하기보다 도리어 그 불안감과 고통을 발산함으로써 형체를 알 수 없이 현재와 과거라는 시간이 뒤섞인 몸을 만들고 그것으로 공간을 가득 채워 관객들에게 발산합니다.”
일상생활의 질서에 의해 억눌려 있던 일들을 하게 된다.
신명 상황에서 사람들은 평소 가슴에 맺힌 것들,
억눌려 응어리진 것들을
어떠한 틀이나 격식에 얽매임 없이 일시에 발산한다.
…
신명의 일차적 기능의 의미는, 평소에는 할 수 없는 감정의 표출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
신명에서의 난장은 아노미적인 혼돈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약속된 무질서로 일상생활에서
쉽게 할 수 없는 감정표현과 행동들이 허용되는 현장이다.
한민, 한성열. (2007). 신명에 대한 문화심리학적 고찰. 한국심리학회지:일반, 26(1), 83-103.
초기의 감정(원)의 한으로의 정착단계
1. 욕구좌절로 인한 분노 및 적개심, 억울함 등의 강렬한 감정 경험. 감정의 직접적인 표출은 사회적인 조건에 의해 불가능한 경우가 많기에 감정을 억제해야만 함.
2. 자신이 겪은 불행의 책임을 외부적인 것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전가시키는 책임 전환. 그에 따라 분노의 감정이 희석되는 심리 내적 적응 과정 발생.
3. 가라앉힌 분노의 감정과 자신의 신세를 떠올리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안정된 감정으로 침전. 이 상태에서 한은 적절한 사회적 통로를 통해 표출되기도 하며, 예술과 같은 승화된 형태의 감정으로 전환
4. 자신의 감정적 관여로부터 분리되어 객관화된 상태의 한. 평온, 조용, 쓸쓸, 어떤 면에선 현실을 초월한 것 같은 초연성.한국문화에서의 정서적 지혜로 이해되기도 함.
한민, 한성열. (2007). 신명에 대한 문화심리학적 고찰. 한국심리학회지:일반, 26(1), 83-103.
한은 어떤 조건에서 발생하는가?
1. 부당한 차별을 받을 때
2. 필요한 것이 심각하게 결핍되거나 타인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결핍되었을 때
3. 자신의 지울 수 없는 실수에 의한 좌절 혹은 불행
한민, 한성열. (2007). 신명에 대한 문화심리학적 고찰. 한국심리학회지:일반, 26(1), 83-103.
사건은 2024년 여름에 떠난 히로시마에서 발생합니다.
시작은 교토에서부터입니다.
저는 일본에 대한 그다지 좋지 않은 인식을 품고 계신 부모님 아래에서 자랐기 때문에 헝가리, 체코, 러시아, 슬로베니아, 독일, 폴란드, 네팔, 중국 등 많은 시간과 돈을 써야 하는 곳은 가봤으나 고작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리는 일본에서의 경험은 전무했습니다.
작년 11월 춘천문화재단의 〈Local creater Inspiring Camp〉을 통해 처음 일본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안 우리는 무리 지어 다녔기 때문에 사실상 그곳은 내게 한국이었고 배경만 이국적일 뿐이었습니다. 나는 4일간의 일본 일정이 끝나고 홀로 교토에 3일 정도 더 머물렀습니다. 별 목적은 없었고 그냥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맛있는 밥을 먹고 산책하고 미술관에 다니는 사치스럽게 시간과 돈을 낭비해도 되는 여행객 신분을 며칠 더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계기로 교토 교세라 미술관 근처의 Kunstarzt라는 작은 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되었던 MIYAKO Toshio씨의 《My father,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라는 전후 일본과 일본 정신에 내면화되고 숨겨진 ‘미국의 지배 구조’에 대한 회화 전시를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시를 보고 완전히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정확히 말할 수 없는 혼란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떠냐고 묻는 전시의 마지막 날을 지나고 있는 작가에게 “Interesting”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작은 미술관 하나에 하루 전체를 쓰거나 기분 좋게 온 여행에서 온 정신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는 해방되었기 때문에.
그는 한국어를 할 수 없는 일본인이었고 나는 일본어를 할 수 없는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잘못 하면 긴 대화를 해야 할 수 있기에. 또 영어는 모두에게 불편했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22년 인생 처음으로 일본에 대한 흥미로운 시각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왔고, 돌아오는 1학기에 〈일본 명작의 이해〉라는 과목을 수강하며 일본 문학과 문화, 사회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켜 왔습니다.
수업을 들으며 같은 수업을 듣는 친구들에게 책을 추천받았고 그렇게 만난 것이 마르그리트 뒤라스 『히로시마, 내 사랑』이었습니다.
이전까지 히로시마는 제게 해방을 위한 장치로만 기억되어 왔었습니다. 몇만 명이 죽었는지는 관심 없었습니다. 알 필요도 없었고 알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원자 폭탄은 터졌고 우리는 해방된 이후였기 때문에. 원자폭탄이 터지지 않은 미래를 살아본 적 없기 때문에…
단순한 질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민족 해방을 위해 20만 명을 죽여도 되는 것일까? 만약 거기에 내 친구나 가족이 있었다면, 민족 해방을 위해서 거기서 죽어달라고 요청할 수 있을까? 정말 그 방법밖에 없었을까…. 그리고 나는 왜 히로시마를 해방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운명적 장치로만 기억해 왔고 무엇이 이렇게 만든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20만 명의 희생자, 그리고 한국인 희생자 2만 명을 죽이고 얻어낸 해방을…
…
그렇게 떠난 7월의 히로시마에서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저는 제 몸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청소년과 어른의 경계에 서 있는 애매한 몸. 다 컸다고 하기에도 뭐하고, 그렇다고 청소년 혹은 성인이 아닌 것은 더더욱 아닌. 아직 산에 혼자 가면 산아빠들이 기특하다고 밥과 술을 사주는 젊은 청년 혹은 나이 많은 소년의 몸. 거기에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국적기 승무원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생김새. 내 몸은 그런 몸입니다. 라면 가게에서도 먼저 주문하라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고 “Sorry”라고 말하는 순간에서야 외국인임이 들통나는 몸.
히로시마의 근교 소도시 오노미치에서 한 중년 일본인 남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영어를 꽤 잘하는 일본 남자로 1박 2일간 출장을 온 차였습니다.
이런 말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잘생겼고 제 스타일이었습니다. 짧은 머리에 잘 다듬어진 수염과 눈썹, 엄청난 근육을 가지진 않았지만, 꽤 두툼하고 어두운 색깔의 몸. 다정함이 깃든 몸. 말할 때 눈을 마주치는 습관. 웃을 때 예쁘게 주름지는 눈가와 웃는 게 섹시한 얇은 입술.
둘 다 오노미치에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저녁을 같이 보냈습니다.
이야기하다가 내일 히로시마에 가서 뭘 할 거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호텔에서 책을 읽을 거예요. 빙수도 먹고. 같은 바보 같은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건 한국에서 하면 되지 않냐는 질문에 나는 관광이 아니라 그냥 쉬려고 온 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 만난 관계임에도 어떤 질문에도 답하고 모든 것을 보여줬지만 그것에 대해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말이 입에서 새어 나오는 순간 내가 한국인이고 그가 일본인임을 그제야 직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더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일 헤어질 사람과 복잡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상했습니다. 식민 치하를 살아본 적 없기 때문에 본디 내 경험이 아니라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습득된, 민족으로서 기획된 한의 각인이, 낯선 한의 감정이 제 안에 서려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 한이 그에게 이해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도 들었습니다. 제 안에서도 세계시민교육을 받고 자란 정체성과 한국의 제도교육 속 역사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으로서 그를 온전히 환대할 수도 온전히 미워할 수도 없었습니다. 도리어 그에게 역사성에 대해 언급하면 미친 칸코쿠진으로 기억될까 두려웠고 침묵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의 학교폭력 사례는 저의 과거에 있던 직접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그리고 공동체적 한이라기보다는 개인적 한에 가깝기 때문에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었습니다.
심지어 대부분 한국에서 비슷한 학창 시절을 가진 한국인으로서, 또는 학교폭력을 주제로 하는 엔터테인먼트가 많이 공유되어 왔고 해당 주제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공유되어 왔기 때문에 공연에서 저의 심적 경험을 관객들로 하여금 경험시키는 것이 성공적이었고, 한풀이가 나름 ‘도달’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그의 몸이 일본이란 민족의 역사를 경유했음을 직감한 순간부터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처럼 다가왔습니다.
경험하지 않았지만, 각인된 것만 같은 한을 바라보면서 개인적이면서 공동체적인, 더하여 정체성이란 제도에 의해 기획된다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이 ‘한’이라고 하는 것을 바라볼 때는 역사적이거나 민족적인, 공동체적인 맥락을 경유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라는 질문이 생겨났습니다.
단언컨대 어쨌든 그와 싸운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해소일 뿐. 그를 믿어볼 희망이 생길 뿐. 거대한 가상의 개념인 국가에서는 무효한. 그저 굉장히 무기력한 소시민적인 해소일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다른 역사성을 가진 대상과 한을 공유할 수 있을까.
한이 국경을 넘어설 수 있을까.
한이 그래서 과연 이해 가능한 것일까.
한의 전달 이전에도 이야기의 전달이 가능할까.
만약 공유될 수 없는 한이 맺혀진 몸은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다시 영원히 삭혀질 수밖에 없을지…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 할 말은 해야 할 것 아니냐 라고 절 미워하실 수도
세계시민주의자의 입장에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각각 재영토화시키고 있음에 미워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미워할 수도
그렇지만 전혀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뒤늦게 보내는 편지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1900년대에 우리는 이러지 않았을까? 칼을 들고 아무렇지 않게 나를 베어버리는 당신. 더 가보자면 1500년대에 우리는 어땠을까. 라멘을 먹으면서가 아니라 포탄과 화살이 오가는 바다 위에서 만났을까. 당신이 역사의 흐름을 막았다면 이런 일 따윈 없었을까. 잃어버린 시대라고 하나요? 미국이 아니라 동아시아가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지배하는 미래를 꿈꿨나요? 나는 이런 상상을 하게 만든 당신 나라의 영광스러우면서 비극이라고 말해지는 역사가 미워요. 물론 나도 우리 민족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법을 배웠어요. 그래요, 군대에서 나는 총 쏘는 법을 배웠으니깐, 총 쏘는 법을 배운 이유가 산속의 고라니를 쏴 잡으려고 배운 것은 아니었으니깐.
당신은 내게 제국의 몸이에요. 패망했으면서 침략했던 그런 역사를 가진 몸. 일본 밖을 벗어나 본 적 없는 몸. 당신의 살가죽은 일본에서 난 물과 음식을 먹고 자랐으니깐, 심지어 당신이 가진 햇빛을 피해 본 적 없는 것 같은 어두운 피부와 얼굴의 점들도 바로 일본 남자의 그것이잖아요. 당신이 입고 있는 적당히 붙은 정장도 일본 샐러리맨의 그것이고요.
나는 이쓰쿠시마섬의 보물관에 있는 갑옷과 검을 바라보며 이것들을 몸에 착용한 당신을 생각했어요. 나는 무서웠습니다. 식민의 기억이라고나 할까요? 이 칼이 누구를 베었을까. 그리고 해치워버리고 싶었던 그 갑옷. 그래야만 나는 살았을 테니깐. 보물관의 티켓을 나눠준 사람도, 보물관을 지키는 경비도 모두 친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과거의 가해와 상처에는 관련 없는 무고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나는 슬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유산이랍시고 지키고 있었죠. 사진을 찍지 못하게, 돈을 내야만 들어갈 수 있게.
그 보물관에서 당신의 손을 다시 상상했어요. 당신의 손은 피비린내 나는 제국의 손 아니고 핸드크림이라곤 발라본 적 없는 것만 같은 부드러움 없음,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손을 닦긴 한 건지 의심스러운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중년 남자의 손이었으니깐요. 손만 본다면 어떤 국적의 몸인지조차 알아차릴 수 없는. 당신이 내가 입을 열기 전에 한국인일 것이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처럼, 당신이라는 역사 이전의 지금 내 앞에 있는 몸을 상상하고 싶었습니다. 다시 당신의 손을 잡고 싶었어요. 내 스스로가 가장 무서웠던 것은 우리를 카테고리화시킨 입과 역사를 닫고 싶었단 점이에요. 그러면 한국에 있는 나의 한국인 친구들은 나를 매국노로 알겠죠. 그렇지만 그때만큼은 그냥 그렇게 믿어보고 싶었어요. 그것은 변함없어요. 나는 그때만큼은 그냥 이 땅에 있었던 무수한 죽음만을 상상해 보고 싶었어요. 나는 그저 한국인이기보다 하나의 인간이 되고 싶을 뿐이에요. 당신은 내가 무엇을 말하는 줄 알죠?
…
당신의 과거와 겪어본 적 없는 당신 민족의 역사가 당신의 모든 점을 설명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지워질 순 없어요. 나는 그렇게 기획된 민족의 몸이니깐. 나는 민족을 잘 알지 못하지만, 당신이 일본어로 꿈을 계속 꾸고 내가 한국어로 꿈을 꾸는 것처럼, 민족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친절한 관계를 위해서 불친절한 상상을 할 수밖에 없는 내가 미워요.
Chat GPT에게 번역을 부탁하자 돌아온 답변.
거부 그리고 위반.
だから…遅れて送る手紙
何が私たちをこうさせたのでしょうか。1900年代の私たちはこんな風だったでしょうか? 平然と刀を手に取り、私を斬り捨てるあなた。1500年代まで遡ると、私たちはどうだったでしょうか。ラーメンを食べるのではなく、砲弾や矢が飛び交う海の上で出会ったのでしょうか。もしあなたが歴史の流れを止めていたら、こんなことは起こら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失われた時代と言いますか? アメリカではなく東アジアが世界の歴史と文化を支配する未来を夢見たのでしょうか? 私は、あなたの国の栄光と悲劇と言われる歴史が、私にそんな想像をさせたことが憎いのです。もちろん私も、自分の民族を守るために人を殺す方法を学びました。そうです、軍隊で銃を撃つ方法を学んだからです。その理由が山の中の鹿を撃ち殺すためではなかったからです。
あなたは私にとって帝国の身体です。敗戦しながらも侵略した歴史を持つ身体。日本を一度も離れたことのない身体。あなたの肌は日本で育った水や食べ物からできているので、日差しを避けたことがないかのような暗い肌や顔のホクロも、まさに日本人男性のそれです。あなたが着ているほどよくフィットしたスーツも、日本のサラリーマンそのものです。
私は厳島の宝物館にある鎧や刀を見ながら、それを身に着けたあなたを想像しました。私は怖かったです。植民地支配の記憶と言えるでしょうか。この刀は誰を斬ったのだろう。そして、壊してしまいたかったその鎧。そうすれば私は生き延びられたでしょうから。宝物館のチケットを配っていた人も、宝物館を守っていた警備員も、皆親切な顔をしていたので、誰一人として過去の加害や傷には無関係な無実の顔をしていたので、私は悲しかったです。しかし彼らはそれを遺産として守っていました。写真を撮ることもできず、お金を払わなければ入ることもできませんでした。
その宝物館で再びあなたの手を想像しました。あなたの手は血塗られた帝国の手ではなく、ハンドクリームなど塗ったこともないような柔らかさのない、トイレで用を足して手を洗ったのか疑わしい、ごく普通の中年男性の手でした。手だけ見ても、どの国の人間かさえ分からない。あなたが私が口を開く前に私が韓国人だとは想像できなかったように、私はあなたという歴史以前の今目の前にいる身体を想像したかったのです。再びあなたの手を握りたかった。私自身が最も怖かったのは、私たちをカテゴリー化し、歴史を閉じたいと思ったことです。それなら韓国にいる私の韓国人の友人たちは私を売国奴だと思うでしょう。でもその時だけは、ただそう信じたかったのです。それは変わりません。私はその時、この土地で起きた無数の死だけを想像したかったのです。私はただの韓国人であるよりも、一人の人間でありたいのです。あなたは私が何を言おうとしているのか分かりますよね?
…
あなたの過去と、経験したことのないあなたの民族の歴史が、あなたのすべてを説明す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が、だからといって完全に消し去ることはできません。私はそのようにして作られた民族の身体なのですから。私は民族についてよく知らないけれど、あなたが日本語で夢を見続け、私が韓国語で夢を見るように、民族とは本来そういうものです。優しい関係のためには、優しくない想像をせざるを得ない自分が嫌いです。
여기까지가 내가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였어요. 간단하고 편리한 방법을 알아요. 여기서 그만두는 거예요.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요. 당신과 나, 이곳과 저곳은 물리적으로 외따로 떨어져 있으니 맞닿음은커녕 스침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면서. 그리고 주어진 땅과 몸을 벗어난 사고 따위 하지 않으면서.
때때로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상상을 해요
나의 모국어가 일본어였다면 어땠을까
한 번도 한국어로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이 되는.
만약 내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난 물과 음식을 먹고 자랐다면
23살의 나는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
내 몸을 벗어나 다른 누구도 될 수 없는
부조리처럼 기이한 이 삶을 나는 이해할 수 없어요.
내 몸을 부숴버리고 싶어요.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주 착각하거나 잊는 것이 무엇인지 아나요?
나의 것을 지키고 다른 민족들의 침투를 막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유물처럼 남아있는 성벽이라는 거. 지금은 역사적으로 그런 서로를 칼로 찌르고 죽이고 잔인하게 피가 튀기고 또 노예로 부려 먹는 그런 야만의 시대에서 벗어난 듯한… 그러나 단지 어느 시점에서 종료되었을 뿐 종결이 아니라는 점을. 사실은 다른 언어로, 무기로, 이전과는 다른 군집의 크기로, 새로운 전략으로, 다른 이유로 서로를 무참하게 죽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바보 같은 점은 또다시 과오를 저지르는 길로 우리 세계가 향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국경이 이렇게까지 개방된 적은 역사상 전례 없습니다. 여전히 내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범죄의 여지가 없는 순수 무결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통과의례를 공항에서 지나쳐야만 하지만.
당신의 부모님께, 조부모님께 여쭤보세요. 알게 될 거예요. 나는 나의 조부모님께서 모두 돌아가셨기에 일본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물어볼 수 없지만, 나의 부모가 당신 나라를 썩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아마 당신의 부모도… 그리고 알게 될 거예요.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대라는 것을. 과거에는 주어지지 않았던 기회와 환경 등 많은 것들을 거머쥘 수 있는 세대. 역사적으로 이례적인 가파른 속도의 개발과 발전의 역사 속에서 동시에 개방과 협력, 그리고 완전히 다른 존재들과 뒤섞임을 경험할 수 있는 세대. 이것이 어디까지, 얼마나, 언제까지 가능할 것인지 실험하는 세대.
이 역사를 잃고 싶지 않아요.
알고 있어요.
감히 안전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입에 담을 수 없는 세계의 혼란과 슬픔, 비탄을.
누군가에겐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이 사치스럽게 다가온다는 것을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않을게요.
그 말로 우리는 항상 패배해 왔으니까.
여기서 닫히면 끝임을 알고 있어요. 문이 닫히면, 우리 사이의 그 골짜기는 더 깊어질 거고, 다시 만나기 위해선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에요. 시간이 지날수록 그 누구의 사안도 아닌 것처럼 흐려질 거예요. 우리가 어디에 서 있었는지, 그래서 대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도 모르게.
당신은 그것을 바라나요? 나는 사실 가당 타면 기꺼이 그것을 선택하고 싶어요. 내가 걸어온 길 뒤에 무엇이 있는지, 내가 길 위에 오르기 전에 그 길은 어떻게,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바로 그것. 그저 앞에 있는 것들을 의심 없이 완전히 사랑할 수 있다는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최선이라면……
…
당신의 언어로 말하고 싶어요.
당신의 말을 나의 언어로 듣고 싶어요.
우리 둘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영어 따위 쓰지 않으면서.
저 멀리 10,000km 떨어진 곳 제3국의 언어를 경유하지 않으면서.
…
그때 나는 기쁘고 또 두려웠어요.
당신 없이는 무엇도 하지 못하는 미물로 전락할 것만 같아서.
두렵고… 두렵고…
두렵고…
그것만은 알아줘요.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それだけは分かってください。
Soredake wa wakatte kudasai.
소레다케와 와캇테 쿠다사이.
私はあなたを憎んでいません。
Watashi wa anata o nikunde imasen.
와타시와 아나타오 니쿤데 이마셍.
だから
Dakara
다카라.
私は
Watashi wa
와타시와
あなたを愛していました。
anata o aishite imashita.
아나타오 아이시테 이마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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