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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에서, 향수 없는 신화에 관하여 @안팎



지금 이곳에 없는 것을 찾는 이들에게 삶은 종종 외롭거나 두렵다. 무언가를 상상해낼 수 있을지, 그것이 정말로 ‘다른 것’일 수 있을지, 그렇다고 한들 이 땅에서 그것이 과연 가능할지. 금세 불가능성으로 가라앉아도 이상할 것 없는 이런 불확실성을 붙들고 헤맨다는 것은 종종 외롭거나 두려운 일이다. 태고의 신화가―기억이―다른 무언가, 나은 무언가, 적어도 다르고 나을 수 있는 여지를 품고 있는 듯한 무언가를 건넨다면 얼마나 반갑고 든든할까. 신화는 그렇게, 가능성의 보고報告, 생의 전망이 된다.

그러나 신화란 얼마나 무력한가. 신화가 전하는 세계는 신화로만 남아 있다. 현재는 언제나 신화적 세계의 불가피한 귀결이거나 무력한 패배다. 신화는, 이 세계가 먼 옛날의 전쟁에서 가져온―제국의 박물관에 전시된 전리품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존재해 보지도 저항해 보지도 못한 것들이 그저 금지의 양식으로 신화 속에 기록된 것일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신화에 가능성을 투사하는 것은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신화의 세계를 이곳에 들이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어쩌면 신화를 파괴하는 일이다. 1)

그러나 마냥 무용하지만은 않으리라. 신화적 세계가 한때 실제로 존재했거나 (혹은, 존재했기에) 언젠가 다시 존재할 수 있을 것임을 보증하는 것은 없다 해도, 그것이 지금의 세계가 맞서 싸우거나 싸움의 싹을 미리부터 차단해야 했던 힘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처단과 금지 너머에서 무언가를 (이들의 어휘로) “도굴”해낼 수 있다면, 이 세계의 깊숙한 공포를 건드릴 수 있다면, 단단한 희망 없이도 우리는 외롭지만은 않은 삶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2)


도굴꾼의 손끝과 감각의 발명

그래서 도굴은 과연 가능할까. 지극히 추상적인 매체로 지극히 구체적인 몸들을 타진하는 문규철의 소리, 재료인지 완성품인지 버려진 것인지를 단정할 수 없는 안민환의 덩어리들이 제기하는 물음을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켜켜이 쌓인 흙과 낙엽과 사체를 걷어 내고 무사히 부장품에 가닿을 수 있을지, 혹은 이 모든 것을 걷어 내면 그곳에는 정말 진귀한 것들―물론 지금의 맥락에서 그것은 비천한 것, 더러운 것, 비체적인 것들이다―이 있을지를 묻는 것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지금 무엇을 찾고 있는지를 과연 알고는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도굴꾼은 땅에 막대를 찔러 넣어 촉각으로 반대편에 놓인 것이 바위인지 도자기인지를 가늠한다고 배웠다. 막대 끝에 닿은, 흙에 싸인 도자기의 둔한 울림, 손끝이 그 진동을 잘 알고 있다면 수월하게 파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지금 도자기와는 달리 맑은 울림조차 느껴본 적 없는 무언가를 찾고 있다. 돌과 사기와 쇠붙이가 아닌, 물 먹은 흙이나 물러 버린 풀뿌리와 뒤섞여 있을 것들이다.

만져 본 적 없는 것에 손끝을 길들일 도리는 없으므로 이것은 훈련이나 학습이 아니라 발명의 문제가 된다. 기존의 역치에 못 미치는 차이에도 반응하는 감각을, 또한 기존의 방식대로 포섭하고 분류하지 않는 감각을 발명하는 문제다. “진행으로서의 덩어리인지 퇴행으로서의 덩어리인지”를 물으면서도 애써 답하지 않고 그 덩어리를 마주할 방법을, 이 하나의 소리를 배경소음과 구분하지 않으면서도 “천천히 주변을 배회하는 사운드, 불규칙한 목소리의 확산 과정”을 낱낱이 들을 방법을 찾는 일이다.


비체를 위한 소화기消化器와 죽음의 놀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세계인 이 세계의 질서로 정렬하지 않으면서 이 과거들을 현재에 밀어 넣을 방법이 필요했다는 뜻이다. 보고 듣는 것을 넘어 직접 받아들이는 일, 소화에 이르면 조금 더 선명해질 것이다. 만찬에 초대된 남하나의 비체들, “내가 생성되기 위해 필요했던 신체, 오줌, 생리혈, 오물, 썩은 음식”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소화할 수 있을까. 이 비체들에 묻어 있거나 혹은 그 자체인 균과 독소를 제거하지 않고 (입으로든 살로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안전하고 유익한 것만을 받아들이고 나머지를 다시금 배설하게 된다면 그 이중의 비체화는 또 무엇이 될까를 생각했다. 도굴은, 새로운 감각과 소화기의 발명은, 결국 우리가 외롭고 두려운 가운데 무엇을 감수하고 감행할 수 있는가 하는 데로 이어질 것이다. 맨 처음으로.

“신념”을 증거 없는 신화적 세계에 대한 믿음과 같은 선에 두어도 좋다면, 조말의 단두대를 발명을 위한 죽음의 놀이로 읽을 수 있겠다. 순교자의 머리를 왕의 머리와 겹치고 그 끝에 얼레를 달았다. 찢기고 걸러져 이곳을 낳고 사라져버린 신화의 세계를 찾는 여정은 이 세계의 머리를, 또한 자신의 머리를 자르는 데에서 시작한다. 계산과 확신이 근대의 직선적 질서를 근거 짓는 방식이라면, 이 절단은 그저 놀이여야 할 것이다. 분명한 위험을 믿지 않고 분명한 허구를 의심하지 않는, 그저 뛰어드는 놀이다.

놀이의 끝은 대개 슬프다. 마칠 시간이 되어 버리거나, 어딘가를 다치거나, 사이가 틀어지거나. 그러므로 놀이는 쉽지 않다. 어제의 아픔을 잊지 못하는 이는 아무런 놀이도 할 수 없다. 구덩이 가에 위태로이 서서 멍하니 아래를 내려보다가는 빠지고 말기 십상임을 잊기, 혹은 돌연 그 속에 나타났던 무언가와 주고받은 섬뜩한시선을 잊기. 정혜진의 “둘로 나뉜 장소의 동굴 밖과 동굴 안을 찾는 게임에의 초대”에 응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아마 이런 것들일 테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빠져도 대개는 쉽게 올라올 수 있음을, 시선의 주인을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음을 또한 잊어야 한다. 내가 있는 곳이 지상임을, 저들이 있는 곳은 끝내는 지하의 게토임을 온전히 잊을 때, 국경을 넘고 제 몸을 넘는 저들의 이주 또한 놀이가―공동의 발명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금세 내게로 돌아온다. 기껏해야 안전한 곳에서 관음하는 스스로를 비판하며 여전히 안과 밖의 구분에 안도하고 만다.


향수 없는 신화에 관하여

〈신화〉와 〈머리 없는 몸과 백 개의 머리를 가진 여인들〉 사이의 틈을 단숨에 도약해 두 곳에 모두 존재하는 대신 한참을 이동했다. 이동에 필요한 시간과 가장 효율적인 동선을 계산했다. 좌대와 작품을, 작품들의 주인을 갈라 보았다. 문장들의 출처를 짐작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제자리로, 과거를 깔아뭉갠 오늘로 돌아오는 나는 필시 이들에게 썩 좋은 관객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돌아오는 것은 아마도 어떤 향수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돌아오지 않고 어디론가 갈 수 있대도 혹은 어딘가를 발명할 수 있대도, 그 역시 향수 덕분일는지도 모른다. 이름 붙일 만한―확신할 만한―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않을 때에야 조금은 안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런 힘도 가능성도 품지 못한, 개선의 예감을 주지 않는, 고통만이 펼쳐진 곳을 그림으로써 나쁘지만은 않은 관객이 되기로 했다. 그것이 이들의 질문과 초대에 내가 응하기로 한 방식이다.


***


제자리에서 쓰는 추기.

뻔하게도, 지금 나의 자리는 전염병이다. 한 해 전의, 그러니까 이 병이 돌기 전의 생활을 추억하고 종식 이후의 회복을 기대하는 이야기들을 종종 접하는 자리다. 이 향수 어린 희망에서 종종 불안한 신화를 읽는 자리다. 가장 약한 이들이 삶을 잃었다. 코호트 격리로 만남을 잃은 시설생활인들, 집합제한으로 구들과 끼니를 잃은 노숙인들, 안내에도 마스크에도 닿을 수 없었던 이주민들. 문자 그대로의 목숨을 잃은 이들과 함께, 이렇게 일상을 잃은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슬아슬한 선을 넘은 것일 뿐 많이 잃은 것은 아니다. 애초에 없었던 자유와 안전과 존엄의 마지막 한 치를 잃었을 뿐이다. 질서의 끄트머리에 겨우 매달려 숨겨져 있었음이 질서의 강화 속에서 뜻하지 않게 드러난다. 질서를 흩뜨릴 때, 질서가 자르고 파묻고 흘려버린 것을 되찾을 때, 적어도 한동안은 오히려 숨겨지는 것이 있으리라. 이들의 신화를 내가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내가 여기서 망설이고 있기 때문이다.



  1. *예컨대 인류학자 조앤 뱀버거는 여성이 지배하는 사회는 단지 신화 속에만 남아 있을 뿐 신뢰할 만한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음을 지적하고, 남미 선주민 신화 분석을 토대로 과거의 여성지배를 모티프로 한 신화들은 여성들의 부덕이나 악행으로 인해 남성이 새로운 지배자가 된 과정을 그림으로써 남성지배를 정당화하는 서사적·의례적 장치로 기능함을 보인다. 그렇다면, “여성이 지배하고자 한다면, 여성은 지도자 역할을 맡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신화부터 떨처버려야 한다.” Joan Bamberger, “The Myth of Matriarchy: Why Men Rule in Primitive Society” in: Michelle Zimbalist Rosaldo and Louise Lamphere(eds), Woman, Culture, and Society, Stanford University Press, 1974, pp. 263-280.

  2. 아래에서 출처를 명시하지 않고 큰따옴표를 단 말은 모두 전시 리플렛에서 인용한 것이다. 따로 표시하지 않고 단어를 넣거나 뺀 곳이 있음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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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안팎: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시각 이미지를 만드는 페미니스트 프로젝트 노뉴워크에 몸담고 있다. 주로 정치와 예술에 관해 쓴다. slowlyaspossibl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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