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um 01. 되기 상태의 오류 ​: 걷지 않은 산책 

걷지 않은 산책 

글: 봄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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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2020. XX. XX.

덩굴이 잘 있나요? 귀엽고 반짝이는 덩굴이가 보고 싶어요.

 

Re: Dear. 2020. XX. XX.

2018. XX. XX. ~ 2019. XX. XX. 최초로 덩굴이 눈에 들어오면서 작업으로 사용하고 싶은 기분이 든 건, 2018년 늦여름 과천에서 서울 방향으로 가는 도로 위였습니다. 덩굴들은 방파제를 넘는 너울성 파도처럼 도로를 따라 설치된 긴 방음벽을 타고 흘러넘쳤습니다. 당시 나는 2016년부터 서울시와 경기도의 지도상 경계를 산책하며 수없이 맞닥뜨린 폐허와 공터의 악몽을 그만 만들고 싶었습니다.[1]

도시 변두리와 모서리를 따라 걸으면                            흔히 볼 수 있는 계란꽃과 개발 중인 공사 현장의 경계를    따라                             설치된  도로방호벽을 재생과 소멸의 소재로써 짝꿍처럼 사용했지요. 그런데 덩굴은 둘로 나눠진, 나누고야 마는, 나누고 시작하는, 나눠 가진 세계의 수많은 경계선을 덮고 파고듭니다. 덩굴로 인해 도시 곳곳에 예측할 수 없는 장소가 만들어지고, 균열과 침범이 생깁니다. 방치되는 순간 덩굴로 완전히 덮이지요. 잠식된 장소는 제거하기 전까지는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덩굴의 안쪽은 성질이 사라지고 비실재의 공간이 됩니다. 그것은 덩굴의 지지체였고, 지지체의 모양이 덩굴의 모양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덩굴이 되어 보기로 했습니다. 덩굴을 계속 보면서 덩굴이 될 수 있다면, 어디로든 틈입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었을 때의 물리적 변화를 실험해 보고 싶었지요. 관찰자이자 행위자이고, 걷는 곳을 꿈틀거리게 만들거나 혹은 모호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2]  

 

2020. XX. XX 실행하고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나는 덩굴을 “자연문화적(Naturalculture)”로 본다.

Re: 2018. XX. XX. ~ 2019. XX. XX. Re: Dear. 2020. XX. XX.

 

Re: 2020. XX. XX. 실행하고 판단해(…) Re: 2018. XX. XX. ~ 2019. XX. XX. Re: Dear. 2020. XX. XX. 2019. XX. XX. 덩굴이 된 나는 세 명의 작가들과 서울과 구리 사이 고덕 수변 생태공원, 서울과 김포 사이 전호리, 서울과 의왕 사이 다리 밑을 걸으며 만나는 경계를 보았습니다. 각각 도시 속 자연을 보전하기 위해 뚜렷한 경계가 필요하거나, 호화롭게 개발된 쇼핑 단지와 공장 지대가 뒤섞여 있거나, 경계를 쉽게 가로지를 수 있는 징검다리가 있는 장소였지요. 우리는 그곳을 산책하며 덩굴, 오리, 노동자이자 작가인 상태가 되어 비일상의 시공간을 잠시나마 경험했습니다. 네, 분명 덩굴은 자연문화적입니다. 설명은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사실 말하고 싶은 건, 덩굴이 아니라 ‘덩굴이 된 나’의 착오에 관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산책하는 덩굴이는 맥락 없이 지나가는 호기심일 뿐입니다. 산책하며 만난 사람들은 덩굴이를 보고 남자야? 여자야? 하며 내기를 걸기도 합니다. 웃긴 건, 덩굴이 안에 사람이 있음을 알면서도 무례한 말을 숨기지 않은 사람들은 덩굴이를 대부분 남자라고 판단한다는 겁니다. 아이들이 덩굴이를 보는 눈은 간혹 흥미롭습니다. 덩굴이 귀신이라며 입을 벌리며 놀라거나, 인간이 아닌 로봇으로 인식합니다. 덩굴이는 얼굴, 몸통, 팔, 다리가 인지되는 인간의 형상이지만 성별을 불분명하게 만든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는 여성으로서 도시의 경계를 산책하기 어려워서이기도 합니다. 도시 외곽을 산책하는 동안 나는 누군가로부터 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주 휩싸였습니다. 실제로 2018년, 머리카락을 파랗게 염색한 여성 시인과 산책할 때 우리를 따갑게 쳐다보는 관음의 시선을 느꼈지요. 2016년 공터를 돌아다닐 때나 공장지대를 걸을 때도 해가 지기 전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신체적 폭력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기억과 예언으로 범벅된 공포는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습니다. 남성 작가와 다닐 때 안심하는 내가 한심했지요. 이 경험이 덩굴로 위장하고 싶은 여러 이유 중 하나였고, 실제로 나를 덮은 덩굴이는 야외나 도시 외곽에서 조금 더 용감해질 수 있었습니다.

 

Re: 2019. XX. XX. Re: 2020. XX. XX. 실행하고 판단해(…) Re: 2018. XX. XX. ~ 2019. XX. XX. Re: Dear. 2020. XX. XX. 2019. XX. XX. 재개발로 인한 변화로부터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어두운 밤길을 조심해야 하고 버스를 기다리는 짧지만 긴 시간 동안 주변의 공사판에서 무언가가 갑자기 날아오거나 떨어지지 않을지 살펴야 하고, 버스 안에서는 치한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알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는 도시에서 임시로 설치되고 이내 철거될 도로방호벽의 어설픈 생김새만큼이나 어설프게 자신의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 작가는 변화와 가장자리가 담지한 잠재적인 불안을 타개하는 방법으로 산책을 선택한다.[3]

 

2019년, “길게 유예해왔던 불안과 두려움을 짧고 사랑스러우며 반성 없이 처리하겠다”고 자신에게 선언했습니다. 거창한 약속은 아니었어요. 어렴풋한 희망이 사라진 만큼 막연한 비관이 없어진 것만으로도 기뻤습니다. 이후 어떤 장면이 반복해서 떠올랐습니다. 양옆이 탁 트인 강가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오리가 물질을 하고, 물 아래 풀이 강의 물길을 따라 둥그렇게 제 몸을 드러내는 일상의 산책 장소이기도 하며,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설고 이름이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선언이 실천되기 전, 덩굴이가 전시장에 ‘전시’되면서 더 커졌습니다.

 

2020. XX. XX. 세상만사를 생물학적 환원론이나 문화적 독특성의 견지에서 보는 것을 멈추기만 한다면,[4] Re: 2019. XX. XX. Re: 2019. XX. XX. Re: 2020. XX. XX. 실행하고 판단해(…) Re: 2018. XX. XX. ~ 2019. XX. XX. Re: Dear. 2020. XX. XX.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덩굴이에 완전히 빙의하지 못했습니다. 전시장에서의 덩굴이의 역할은 덩굴을 촬영한 사진과 텍스트, 세 명의 작가와 협업한 영상의 네러티브를 입체적으로 만들고, 관객과 함께 체조하며 종이로 접은 오리를 건네 주는 메신저였습니다. 그런데 덩굴이 사진만 마구 찍고 전시는 보지 않고 사라지는 관객이 꽤 있었습니다. 발이 크다며 여자는 아닐 거라고 말한 작가도 있었습니다. 나 역시 관객이 요청하면 사랑스러운 제스처를 취하거나, 기둥에 붙어 귀엽게 손을 흔들었지요. 몸을 동그랗게 말면 인간 형상이 다소 사라지는데, 그러면 전시장의 덩굴이는 인공 덩굴로 만든 납작한 조형물로만 인식되어 지나치게 안전한 상태만을 지속합니다. 때로 동물원에 갇혀 이상 행동을 하는 동물이 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전시장의 공간성은 예상보다 견고하고, 관객과 덩굴이 사이의 벽은 상당히 두껍더군요. 전시장에서의 덩굴이는 덩굴을 한껏 껴안아 준 여학생의 따듯함과 열심히 체조를 따라 하는 친구들의 모른 척에 도취하여 사명감이 소거되기 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덩굴-되기의 모양을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했습니다. 덩굴이는 그 어디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Re: 2020. XX. XX. 세상만사를 생물학적 환원론이나 (…) Re: 2019. XX. XX. Re: 2019. XX. XX. Re: 2020. XX. XX. 실행하고 판단해(…) Re: 2018. XX. XX. ~ 2019. XX. XX. Re: Dear. 2020. XX. XX.

2020.XX.XX 이제 숲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게 되는 이러한 경험은, 당신이 자신을 이중으로 나타나는 모습 속에서 보게 되는 것에 달려 있다. 당신은 숲을 지나 당신이 갈 길을 가게 되며, 동시에 당신은 밖에서 보는 것처럼 숲에 삼켜진 당신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5]

 

덩굴을 목격한 최초의 사건은 덩굴이 되어 걷고, 움직이면서 만난 우연적 사건이 되어 나를 통과했습니다. 가까스로 숨을 쉴 줄 알게 되었습니다.[6] 비록 전시장에서 착오를 거듭했지만, 아무도 없을 때면 숨을 고르며 의자에 달라붙거나 벽에 붙어 덩굴이의 미래를 그려보려 애썼습니다.

 

Dear. 2020.XX.XX

하루라도 빨리 덩굴이는 나를 떠나야 합니다. 넝쿨 식물의 땅속줄기가 되어 ‘기억을 (가진) 살아있는 질료의 하층’[7], 복잡하게 얽힌 이면의 장소에 끈질기게 들러붙어야 합니다. 나눠진, 나누고야 마는, 나누고 시작하는, 나눠 가진 세계 속 나를 잃어야 합니다. 덩굴이는 경계로 인해 소외되고 누락된 존재를 닮아야 합니다. 그들과 관계를 맺을 때마다 모양을 바꾸어, 그들의 탈주를 도와주는 수백 개의 몸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그들은 범주 없는 길이 그려진 새로운 지도를 갖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걷는다는 표현을 줄이십시오. 덩굴이는 걷다가 멈추어 그들과 머무르십시오. 마침내 그들이 걷게 하십시오.    

 

2020. 07. 03. 봄로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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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풍경>, 2019, 스페이스 XX,  사진_이재욱

[1] 이에 관한 작업은 『답 없는 공간: 근사한 악몽』 (미디어버스, 2019)으로 출간하였다.

[2] 한편, 주체의 방향에서는 산책이지만, 타자의 관점에서 그것은 유영일 수 있다. 그의 자율적 좌표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독풍경>, 2019, 스페이스 XX, 봄로야 개인전, 김민관 리뷰 중 발췌

[3] <다독풍경>, 2019, 스페이스 XX, 봄로야 개인전, 유은순 리뷰 중 발췌

[4] 『해러웨이 선언문』, 도나 해러웨이 지금, 황혜선 옮김, 책세상, 155쪽

[5] 『본다는 것의 의미』, 존 버거 지음, 박범수 옮김, 동문선, 121쪽

[6] 불안이 조금은 가라앉았고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지만, 걷고 싶은 강가와 그곳을 노니는 오리들 혹은 행인들을 알게 되었다지만, 이것은 성장의 서사가 아니다. 답 없는 공간을 드디어 탈출한 이야기도, 읽기에 능해져 어떤 것이든 편히 살필 수 있게 된 이야기도 아니다. <다독풍경>, 2019, 스페이스 XX, 봄로야 개인전, 안팎 리뷰 중 발췌

[7] 각각 『해러웨이 선언문』 86쪽에서 다룬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 『여성-되기』 김은주 지음, 에디투스, 154쪽에서 재인용한 브라이도티, 『유목적 주체-우리 시대 페미니즘 이론에서 체현과 성차의 문제』, 258-259쪽 참조

덩굴-되기는 ‘방향성’이 아닌 ‘방위성’(方位性)을 탈각시킨다.

「걷지 않는 산책」의 풍경은 산책자가 바라보는 세계의 풍경이 아닐 것이다. 산책자는 스스로 걸으며 사색의 능력을 부여받은 주체로 세계를 시선 앞에 세운다. 세계란 거닐며 유람하는 그가 공간에 방향성을 부여할 때 나타난다. 그것이 목적적으로 규정된 세계든 의미연관을 가닥 잡는 지평이든 산책자란 유유자적 걷지만 부유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방향성이랄 것이 있다. 그리고 타자의 시선에서 그 움직임은 유영과 표류처럼 보인다. 그러나 산책자와 타자 사이에서 발견되는 뒤집힌 시선과 방향성은 이미 어떤 자격이 부여된 이후의 세계의 성격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만약 ‘이후’의 성격이라면 그 대안으로 원형적 세계를 찾아야 하는 것일까? 대답하기 어려운 여기에 ‘덩굴이 되기’ 작업의 아포리아가 놓여있다. 막다른 길 끝엔 실패의 자리가 있을까? 그곳에서 ‘덩굴이 되기’ 작업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봄로야 작가가 ‘물리적 변화’를 실험해보고자 했을 때 이것이 목표하는 것은 관찰자도 행위자도 아니다. 그렇기에 「걷지 않는 산책」이 보여준 풍경은 세계적이지 않다고 강조해야 한다. 장소를 잠식하여 성질을 지운 후 비-실재의 공간을 만드는 덩굴-되기는 바로 탈-산책자-되기다. 덩굴-되기는 ‘방향성’이 아닌 ‘방위성’(方位性)을 탈각시킨다. 경계에 침투하는 덩굴이는 비식별 공간이 된다. 하지만 ‘비식별 된다’는 형용모순이다. 어떻게 식별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되기’로 나타나는 것일까? 논리적 모순처럼 보이는 이 한계가 바로 우리 일상공간을 ―마치 덩굴이처럼― 덮고 있다. 도시개발은 사물에 학명과 성격을 부여하는 학자(산책자)처럼 공간에 성격을 부여하여 그곳의 정체성을 정립한다. 그러나 “경계를 쉽게 가로지를 수 있는 징검다리가 있는 장소”는 어디서든 발견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재발견을 가능하게 한다. 

 

“덩굴로 인해 도시 곳곳에 예측할 수 없는 장소가 만들어지고, 균열과 침범이 생깁니다.

방치되는 순간 덩굴로 완전히 덮이지요. 잠식된 장소는 제거하기 전까지는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덩굴의 안쪽은 성질이 사라지고 비실재의 공간이 됩니다.”(봄로야)

 

부지불식간에 침범한 덩굴이는 [계란꽃/도로방호벽]과 [재생/소멸]의 상호 비가역적 공간을 동시에 내비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코스모스(Kosmos)란 장인의 목적론적 조율을 바탕으로 리라의 줄을 뜯어 만든 화음이다. 그 세계(Kosmos)가 가능한 모든 소리는 아니다. 덩굴이는 (불)협화음 사이사이로 침투를 감행한다. 과정을 인식할 수 없으나 우리는 깜짝 놀랄 수는 있다. 그 감탄이 작가를 움직이게 하는 영감이 된다. 

그러므로 덩굴이는 가장자리이지만 세계의 복판이다. 가늠할 수 없는 속도로 부지불식간에 덮쳐오는 덩굴이는 도시 곳곳에 예측할 수 없는 장소를 만든다. 봄로야 작가가 덩굴이를 경험했던 것은 바로 이것의 (비)세계적 성격이기 때문이다. 

 

“사실 말하고 싶은 건, 덩굴이 아니라 ‘덩굴이 된 나’의 착오에 관한 것입니다.”(봄로야)

 

그렇다면 봄로야 작가가 토로한 ‘덩굴이 된 나’의 착오는 무엇일까? 앞서 간단히 짚고 넘어갔던 탈-산책자-되기를 다시 고려해야 한다. 경계를 전도하기 위해 시도된 ‘덩굴 되기’는 “관찰자이자 행위자이고, 걷는 곳을 꿈틀거리게 만들거나 혹은 모호하게” 만들기 위한 일련의 물리적 실험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성별을 유추해 낼 특별한 단서가 없는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관찰자)은 덩굴이(객체/관찰자)를 남자라고 판단한다. 그뿐만 아니라 행위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내기를 하며, 마치 그 판돈이 걸린 내기 대상에서 ‘젠더’가 아주 중요한 것처럼 다룬다. 산책자/행위자의 세계가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젠더 목적적으로 조율 되어 있다. 덩굴이는 분명 비식별 되기 위한 일종의 탈-경계성의 유희지만, 충분하지 못했던 것일까? 작가는 작업 앞에서 머뭇거린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덩굴이에 완전히 빙의하지 못했습니다.”(봄로야)

 

봄로야의 「걷지 않는 산책」은 부정적 술어로 가득한 비의(悲意)적 세계이다. 되기, 착오, 실패, 하지 못함, 두려움, 부동 등 작가의 작업을 따르다 보면 우리는 깊은 수동성에 빠지고 마는 것일까?  ‘덩굴 되기’의 머뭇거림(머무름)은 네거티브한 토대 위에서 자라난 착오를 향한 프로세스였을지도 모른다. 그 뜻은 실존의 현사실적 운명인 비의(備擬)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세계’를 꿈꿀 필요가 없음을 말한다. 우리의 세계는 여기뿐이고, 운명이란 이곳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근원적 수동성을 뜻한다. 수평선 너머 신세계(바깥)를 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계선은 질료의 하층에 있다. 포스트-콜롬버스적 시도는 “범주 없는 길이 그려진 새로운 지도”를 프로세스이다. 

* 산책자와 학자를 함께 묶는 것이 마땅찮은 일일까? 때로는 외투를 거꾸로 뒤집어쓴 산책자가 이방인과 아이로서 길을 느릿하게 걸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관람하고 있는 그 풍경은 엘리트-산책자의 투사된 꿈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글 말미에 조금 더 살펴보겠지만, 탈-경계성을 상상하며 작업하던 탈-산책자-되기는 충분한 시도가 되지 못하는 착오의 자리가 된다. “이는 여성으로서 도시의 경계를 산책하기 어려워서이기도 합니다.”(봄로야)

**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속도개념을 나타내지 않는다. 헤테로토피아에 대한 사고는 헤테로크로니아와 함께 사고 되어야 하는데, 덩굴이의 ‘비식별 되기’는 시간성마저도 양방향으로 열어놓는다. 그러므로 「걷지 않는 산책」의 시간 구조는 주목할 만하다. 덩굴-되기 실험에 대한 ‘댓글’처럼 보이는 이 응답들은 시간이 교차적이다. 이 글쓰기 공간마저도 과연 하나의 장소를 점유하고 있을지는 생각해봄 직하다.

*** 하루라도 빨리 덩굴이는 나를 떠나야 합니다. 넝쿨 식물의 땅속줄기가 되어 ‘기억을 (가진) 살아있는 질료의 하층’,복잡하게 얽힌 이면의 장소에 끈질기게 들러붙어야 합니다.”(봄로야)

​_히스테리안 편집부